괴작열전(怪作列傳) No.98
전 세계를 뒤흔든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여파로 각종 관련 미디어가 쏟아져나올 무렵, 코믹스 버전으로서 인기를 끈 대표적인 작품이 천하만화의 '스트리트 파이터: 가두쟁패전' 이었다는 얘기는 지난번 리뷰를 통해 충분히 설명이 되었습니다.
워낙 원작 게임의 인기가 뜨거웠기 때문에 사실 많은 만화가들이 이 작품의 코믹스화를 시도했었는데요, 일본의 나카히라 마사히코 라든가 하시구치 타카시 같은 만화가의 작품들을 포함해 미국과 브라질에서도 '스트리트 파이터'의 코믹스 버전이 발행되었습니다.
ⓒ Editora Escala. All rights reserved.
당연히 한국에서도 '스트리트 파이터 2'의 토종만화를 발간하게 되는데요, 유정견/지문 콤비의 '스트리트 파이터 II'를 비롯해 대원문화사 산하 소년챔프지에 실렸던 박종준/홍영기 콤비의 '스트리트 화이터 III'가 그 대표작입니다. (당시 소년챔프의 인기 만화중에는 '붉은매'도 있었는데 이 두 작품의 독특한 인연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하지요)
특히 소년챔프판 '스트리트 화이터 III' ('파이터'가 아니고 '화이터'입니다 ㅡㅡ; )는 장르에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을 보였던 만화입니다. 기존의 만화들이 원작게임의 대전요소를 살려 무협내지는 액션물로 가공했던 것에 비해, '스트리트 화이터 III'는 이른바 '쿤타맨' 스타일의 화장실 유머가 가미된 코믹/패러디물에 가까웠거든요.
ⓒ Daiwon. All rights reserved.
어쨌든 소년챔프의 모회사인 대원측이 이 작품을 토대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는 건 사실 좀 의외였습니다. (원래는 OVA로 기획된 작품이 어쩌다보니 극장에까지 걸리게 된 듯 합니다)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인기에 편승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스트리트 화이터 III'의 완성도는 당시 기준으로도 영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판권갖고 만든것도 아닐테지만 하필 '스트리트 화이터 III'를 원작으로 택할게 뭡니까.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1992년작 [거리의 무법자]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입니다. 아마도 캡콤사의 라이센스를 의식한 탓인지 제목에 '스트리트 파이터'를 갖다불일 만한 배짱은 없었나 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서기 2010년 제3차 세계대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멸망시키고 막을 내렸습니다. 그로인해 지구는 갑작스런 빙하기에 이은 지형변화로 인해 모든 대륙이 물에 잠긴 별이 되고 맙니다. 얼마후 이 기형적인 지구에 유일한 도시가 하나 생겼는데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꿈의 도시'라고 부르지요. 사상 최악의 날림으로 그린 핵폭발 장면과 함께 짧은 해설이 끝나면 오락실에서 대전게임을 하며 열올리고 있는 제갈생(원작의 켄)과 이소룡(원작의 류)의 모습이 갑작스레 나타나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어이어이. 핵전쟁으로 지구가 멸망했다면서 오락실에서 죽때리는 저들은 생명체가 아니라 터미네이터인건가?)
참고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켄,류,춘리,달심,블랑카,가일,바이슨,혼다,베가 등 총 9명인데요, 이들 캐릭터가 한명씩 등장할 때 마다 쥐톨 만한 글씨로 신상명세서를 타자치듯 천천히 소개한다는 겁니다. 그 신상명세라는게 작품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게 문제죠.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성명:이소룡
국적:대한민국
나이:19세
혈액형:A형
신장:175cm (실제로는 174cm이나 발바닥에 때가 1cm 두께로 붙어있기 때문에 175cm 라고 우긴다)
체중:68kg (먹는양에 비해선 너무 가벼운 편)
특기:싸대기권....... 중략...
뭐 러닝타임이 한 2시간이나 되면야 웃으면서 넘어가겠습니다만 고작 50분밖에 안되는 러닝타임에 이러고 앉아있으니 참..... 암튼 제갈생과 이소룡은 존재 자체가 범죄수준인 인간 말종급 놈팽이들로서 툭하면 지들끼리 쌈박질이나하는 인생입니다. 스승인 우라질 도사는 손녀 줄리(원작의 춘리)를 시켜 이 멍청한 제자를 급히 호출하는데요, 이유는 자신과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을 해서 10판을 내리 이긴 수수께끼의 사나이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섭니다. 이 황당한 미션을 위해 제갈생과 이소룡은 마지못해 길을 나서죠.
한편 달라이신과 그의 애완견(?) 블랑카는 자신들에게 모욕적인 말 - 블랑카보고 멍게라 하고 달라이신에게 문어대가리라고...- 을 한 괴한 바이슨을 찾아 복수의 여정을 떠납니다. 그리고 전투기를 타고 가던 도중 느닷없이 비행기에 침입한 바이슨이 코딱지를 묻히는 바람에 추락한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가일 등 아무 상관없이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난 괴인들이 연합해 바이슨과 일전을 벌인다는 뭐 그런 내용 올시다.
[거리의 무법자]는 50분밖에 안되는 러닝타임 가운데 9명의 캐릭터를 등장시킨것도 모자라 무려 1부와 2부로 나누기까지 하는 엽기적인 만행을 저지르는데요, 내러티브의 형성이나 캐릭터 구축에는 전혀 관계없이 개그 일변도로 나가는 작품입니다. 그 개그라는게 어느정도 수준있는 하이코미디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만 개그의 8할은 코딱지나 발냄새같은 더티한 화장실 유머로 이루어져 있지요.
포스터의 카피문구를 보면 '여름은 우리가 책임지겠다!'라는 사기성 발언을 일삼고 있는데요, 아마 썰렁한 유머로 더위를 식혀주겠다는 내용이거나 이열치열이라고 보는 이로 하여금 뚜껑이 열릴때까지 열을 받게 해주겠다는 의미거나 둘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 Daiwon ANIMATION. LTD. All rights reserved.
아무튼 수많은 '스트리트 파이터'관련 미디어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 중 가장 엽기적이면서 치사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거리의 무법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흥미롭게도 이 작품을 감독한 분이 심상일 감독이라고, 이분은 훗날 소년챔프에 '스트리트 화이터 III'와 함께 연재 중이던 인기 만화 '붉은매'의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연출하게 됩니다. 캅셀의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송락현님의 말에 의해면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는 연출가라고 하는데, 왜 이런 작품들만 골라서 맡게 되었는지 미스테리할 따름입니다.
지구상에 다양한 '스트리트 파이터' 관련 작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리의 무법자] 만큼 엽기적인 컨셉을 자랑하는 것도 드물겁니다. 암튼 이렇게 황당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임에도 속편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 [거리의 무법자]의 후속편은 지금까지도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거리의 무법자]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Daiwon ANIMATION. LTD.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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