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97
1983년대 이래, 홍콩영화계는 자국내에서 헐리우드 영화에게 1위자리를 내준 적이 없을 만큼 견조한 흥행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골든 하베스트라는 굴지의 영화사가 있었고, 그 바탕에는 홍콩영화의 근간인 장르적 특징, 즉 액션물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실 홍콩은 국가의 규모면에선 도시규모의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자국내의 흥행실적만으로 시장을 유지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당시 홍콩영화의 수익구조는 일단 내수시장에서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철칙이었고 (이는 기본 제작비의 회수를 의미합니다), 이후 대만시장과 일본, 한국 등 주요 아시아국가들에서 수출로 인한 흥행수익을 챙기면서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러한 방법은 잘 먹혀들었는데, 1980년대 후반 홍콩느와르라는 장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홍콩영화의 성장세는 정점을 이룹니다. 한국의 중고등학생중에서 썬글라스에 바바리, 성냥깨비의 로망을 모르는 아이들이 없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1990년대의 홍콩영화계는 혼조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홍콩영화계의 성장기를 이끈 느와르물이 서서히 퇴색하면서 서극 감독의 [황비홍]을 필두로 다시금 무협액션물쪽으로 장르를 이동하게 됩니다만 영화의 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정체 내지는 퇴보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이 전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면서 홍콩영화계는 10년만에 헐리우드 영화에 1위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이러한 몰락에는 홍콩영화가 가지고 있던 내부적인 한계, 즉 내수시장에서 제작비를 회수해야한다는 철칙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상대로 한 내수시장에서 본전을 뽑으려면 영화의 제작비에는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저비용, 고수익을 추구하는 저질영화들이 생산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 겁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의 면모를 분석해 보면 유명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임에도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스트리트 파이팅]은 1993년에 제작된 영화로서 몰락의 전조를 보이던 홍콩영화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초급학교패왕 超級學校覇王]인데 영어제목은 'Future Cops'로 어딘지 조화롭지 못한 느낌을 줍니다. 국내에는 [스트리트 파이팅]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홍콩 스트리트 파이터]로 더 잘알려진, 참 특이한 작품이지요.
ⓒ Golden Harvest Company. All rights reserved.
굳이 설명을 안드려도 아시겠지만 본 작품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캡콤사의 명작 대전액션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에 기반을 둔 실사판 영화로서 국내에서 제작된 [스트리트 파이터: 가두쟁패전]보다 1년 뒤에 나온 작품입니다. 사실 작품의 외적인 면모만 보자면 [스트리트 파이팅]은 가히 '블록버스터급'입니다.
먼저 제작사가 골든 하베스트였는데다, 연출을 맡은 사람은 왕정 감독으로서 [지존무상] 이후 카지노 무비의 대부처럼 알려진 인물이었지요. 물론 세월이 흐른 지금 세간의 평가는 졸작과 평작을 오가는 다작 감독으로 홍콩영화의 질적수준을 저하시킨 주범 중 한명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당시 왕정 감독의 이름은 홍콩영화팬들에게는 꽤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연진을 보면 이건 완전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드림팀 수준입니다. 유덕화, 곽부성, 장학우, 정이건, 임달화, 구숙정, 막소총, 양채니, 오요한 등 홍콩의 어지간한 주연급 배우들은 모조리 끌어다가 출연시킨 작품이거든요. 특히 유덕화, 장학우, 곽부성은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여명과 함께 이른바 '홍콩 4대천왕'이라고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배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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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과연 [스트리트 파이팅]은 이런 화려한 면모에 걸맞는 내실을 갖춘 작품이었을까요? 먼저 줄거리를 살펴봅시다.
때는 서기 2045년, 세계 제일의 금융도시로 성장한 홍콩을 장악한 암흑가의 보스, 바이슨 장군이 특수경찰인 비룡특공대에 의해 체포됩니다. 체포된 바이슨은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이에 바이슨의 부하인 켄과 사가트 등은 선고를 내린 판사 여철웅을 세뇌시키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떠납니다.
첩보를 입수한 비룡특공대의 일원인 베가, 가일, 달심은 1993년의 홍콩으로 가서 악당들을 막고 이보다 먼저 여철웅을 찾기위해 총력을 기울이는데, 이들이 뜻밖의 인물인 대웅이라는 이름의 왕따학생을 만나게 되면서 영화는 갑자기 학원 코미디로 돌변합니다. 과연 베가 일행은 성공적으로 여철웅을 찾아내고 악당들을 처단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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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터미네이터]스런 설정의 이 작품은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물러터진 수박같은 영화입니다. 류 역을 맡은 곽부성은 영화초반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뒤이어 베가 역의 유덕화와 켄 역의 정이건, 가일 역의 장학우 등 정말 어울리지 않는 배우들과 캐릭터의 알딸딸한 조합이 관객들의 정신을 혼미케 합니다. 아마 그 중에서도 가일을 거꾸로 뒤집어 빗자루질 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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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액션에 있어서도 이건 뭐 눈뜨고 못봐줄 지경이에요. 악당 보스인 바이슨이나 부하인 켄이 빨간 옷을 입어서인지 무려 3배 빠른 속도로 액션씬을 선보이는데, 하이고~ 이게 정녕 [황비홍]으로 눈높이가 높아진 관객들에게 먹힐거라 생각한 걸까요? 배우들은 심히 부담스런 개그를 선보이느라 분투를 하고 있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그저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콧수염 달린 블랑카로 분장한 오요한과 춘리로 분한 구숙정 엄마가 등장하는 다음 장면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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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건 정말 안습이지 않습니까? 홍콩의 미래가 걸린 임무를 띄고 파견된 사실을 망각한채 여인네와 슈퍼마리오 커플티를 입고 연애질하는 베가하며, 악당이었다가 갑자기 착해지는 켄 등 지금껏 '스트리트 파이터 2'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 뭐하나 제대로 나온게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스트리트 파이팅]의 괴악스러운 느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마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크리스천 베일 같은 배우들을 모아놓고 [외계에서 온 우뢰매]를 찍어놓은 기분이랄까요.
ⓒ Golden Harvest Company. All rights reserved.
이렇듯 무늬만 '스트리트 파이터'를 채용한 [스트리트 파이팅]은 홍콩영화계의 전설적인 캐스팅을 성사시키고도 관객들에게는 충격만을 안긴채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건질 수 있는 건 풋풋한 시절 양채니의 모습과 좀처럼 보기드문 스타급 배우들의 망가진 모습 정도일려나요. 한때 한국 극장가를 휩쓸었던 홍콩영화의 인기는 이렇게 점점 괴작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관객들에게 외면당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한때의 추억이긴 합니다만 내수시장의 성공과 수출의 확대, 그리고 다시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모습을 보노라면 어쩐지 남의 일 같지가 않군요.
* [스트리트 파이팅]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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