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일.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 한국만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막을 열었다. 한때 청소년 유해매체로 규정지어져 해마다 5월 5일이면 만화책 화형식을 집행하는 등 온갖 수모와 굴욕을 겪었던 한국만화의 역사가 벌써 1세기나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1980년대는 그 중에서도 만화시장의 황금기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가정용 게임기가 발달했던 시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극장가의 문턱이 낮았던 것도 아니다. 젊은이들이 즐길 오락거리는 한정되어 있었고 따라서 동네 만화방에는 늘 시간을 떼우러 온 학생부터 동네 백수들이 넘쳐 흘러 특유의 퀘퀘한 냄새를 풍겼다.
그런 1980년대 만화계의 큰 특징 중 하나라면 아구, 권투 등 일부 스포츠를 주종목으로 다룬 장르물이 붐을 이뤘다는 것과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등 명랑만화 세대 이후의 만화가들이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만화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호황을 누리면서 덩달아 반사이익을 본 것은 침체일로에 놓였던 충무로였다. 6,70년대보다 질적인 면에서 오히려 퇴보현상을 보이고 있던 한국영화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나마 '이름값'으로 관객몰이를 해줄 원작이 등장했던 셈이다. 차마 눈뜨고 보기가 민망한 완성도의 작품들이었지만 이런 작품 중 일부는 원작의 후광에 힙입어 흥행에 성공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장호의 외인구단]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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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원작이 된 '공포의 외인구단' (리뷰 바로가기)은 완결될 때 까지 무려 100만권이 팔려나간 밀리언셀러로 등극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원작자인 이현세는 단숨에 한국만화계의 거목으로 떠올라 이후로도 오혜성-엄지-마동탁 트리오가 등장하는 이른바 '까치 시리즈'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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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인구단'이 완결된지 이듬해 충무로에서 이 작품을 실사로 옮기는 계획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각 영화잡지 및 매체들을 통해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1974년 [별들의 고향]을 발표해 일약 스타감독이 된 이장호 감독이 연출을 맡고 KBS 드라마 [별을 쫓는 야생마]로 신인상을 수상해 청춘스타의 계보에 발을 들인 최재성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원작의 인기만큼이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물론 논란의 여지도 적지 않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히로인인 엄지 역에 이보희가 캐스팅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당장 청계천에 가서 '공포의 외인구단'을 사오라고 호통을 치고 원작자의 신상과 연락처를 수배하라고 지시했다. 잠시후 20권이나 되는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내 앞에 놓여졌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만화이기에 나만 모르고 모두 알고 있단 말인가. 절반쯤 읽을 무렵, 정말 보통 만화가 아니구나! 이렇게 재미있는 만화를 만약 누군가 다른 영화인이 읽는다면… 라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그대로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당장 서둘러 원작자인 이현세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 씨네21 No.246 (2000.4.4) <공포의 외인구단>제작착수와 <어우동>기획까지 중에서 이장호의 회고
이보희는 이장호 감독의 [과부춤] (1983), [무릎과 무릎사이] (1984), [어우동] (1985) 등에 잇달아 출연하며 이 감독의 여성적 페르소나로 떠올랐지만 출연작들의 성격상 그녀에게는 에로배우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었고, 그런 그녀가 청순의 대명사인 엄지 역에 캐스팅되었을 때 팬들의 항의가 빗발쳤던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장호 감독은 이보희의 캐스팅을 강행해 그녀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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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외인구단의 감독 손병호 역에는 안성기, 외팔이 최관 역의 나한일이 캐스팅되었고, 소심한 투수 조상구 역은 원작자인 이현세의 추천을 받은 조상구(당시에는 본명인 최재현으로 활동)가 맡았으며, 혼혈인 출신의 문제아인 하국상 역에는 권용운 등 신인급 연기자들이 공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되었다. 한편 프로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답게 해설가로 유명한 하일성이 까메오로 출연했고 출범초기였던 한국야구 프로리그의 인기팀 해태 타이거즈로부터 협찬을 받았다. 1 2
자료제공: 네이버 블로거 양덕진님 (http://blog.naver.com/yang3995)
한편 이 작품은 원래 제목인 [공포의 외인구단]이란 제목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당시 군부정치의 검열기준에서 볼때 '공포'라는 단어가 현 정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는 이유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외인구단]이라는 제목으로 가닥이 잡혔고, 개봉시에는 감독인 이장호의 이름을 부각시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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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이장호의 외인구단]이 소설로도 출간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작품의 원작이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소설판 '공포의 외인구단'은 영화개봉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영화의 프로모션을 위해 발간된 기획물로서 이현세의 원작만화를 소설로 옮긴 2권짜리 작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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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의 외인구단]은 기본적으로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요 플롯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러닝타임의 제약상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 오혜성과 백두산을 비롯한 선수들이 손병호의 제의를 받아들여 훈련을 받는 과정과 프로야구에서의 연승행진, 그리고 마동탁과 오혜성의 대결구도 및 비극적 결말로의 이행이 대부분 원작과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아쉬운 것은 이렇게 원작에의 의존도를 높힌 결과 영화만의 매력이 거의 없다는 점, 특히 여러 캐릭터를 동시다발적으로 등장시킨 탓에 내러티브의 중심인 엄지에 대한 혜성의 애착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국상이나 최경도 같은 캐릭터를 너무 외모적인 면에서 접근한 결과 오히려 원작과의 이질감만을 키웠다는 점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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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원작속의 대사, 이를테면 '너는 내게 신이었고, 네 편지는 내게 성전이었다' 등과 같은 명대사가 막상 배우들의 입으로 영화상에서 표현될 때 왠지모를 유치함을 느낀다는 부작용도 있다. 그리고 스포츠 영화의 생명인 시합장면의 현장감이 졸속 제작으로 인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장호의 외인구단]의 완성도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인데, 이 작품이 작품성이 아닌 오로지 흥행을 위주로 기획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요즘은 돈을 좇아가며 영화를 만들지 않나 싶어요. 오직 흥행, 흥행뿐이죠. 물론 나도 흥행만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든 적이 있긴 하지만...(중략)... 그게 [외인구단]이죠.
- 레이디경향 2009년 5월호. 이장호 감독과의 인터뷰
물론 장점도 있다. 오혜성 역의 최재성은 다소 우려되었던 원작 캐릭터와의 싱크로 문제를 극복했고, 특유의 서늘한 눈빛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이병헌([폴리스]), 최민수([테러리스트]) 등 다수의 배우들이 이현세 원작의 영화 및 드라마에서 오혜성 역을 맡았으나 아직까지도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깊이 인식된 오혜성은 최재성이라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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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에 가까웠던 조상구는 이번 작품에서 조상구 역으로 열연을 펼친 결과, 1987년작 [지옥의 링]에서는 오혜성 역에 캐스팅되어 주연을 맡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비록 스타급 배우로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온건 아니었으나 최근 [야인시대]에서 시라소니 역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등 개성있는 배우로서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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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여러 가지 우여곡절 속에 개봉된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서울관객 287,712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었는데 당시 손익분기점의 기준이 6,7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공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이장호의 외인구단]에게 있어 최대의 성과는 이러한 외형적인 흥행성적이 아니라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 일 것이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란 원작 속의 명대사를 가사로 담은 이 노래는 '가요 톱10'에서 5주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전국적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3
자료제공: 네이버 블로거 양덕진님 (http://blog.naver.com/yang3995)
이같은 성공에 힙입어 [이장호의 외인구단 2]가 곧 제작되었으나. 최재성, 나한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캐스팅이 교체되었으며 감독 또한 이장호에서 조민희로 교체되었다. 더군다나 원작의 결말을 무시한채 강행한 무리한 각색으로 인해 완성도마저 떨어뜨려 흥행과 비평에서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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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월이 흘러 2008 베이징 올림픽의 금메달 획득과 2009 WBC 준우승에 빛나는 한국 야구 대표팀의 활약으로 인해 전국적인 야구붐이 조성되어 얼마전부터 [2009 외인구단]이라는 TV시리즈가 방영되고 있다. 허나 현대적인 외인구단의 멋진 각색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싸이코 막장 드라마로 변질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어 다소 실망스러운게 사실이다. 역시 '공포의 외인구단'은 추억속의 1980년대에 남아있어야 했다. 적어도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었으니까.
* [이장호의 외인구단]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판필름 혹은 그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저작권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외인구단 2(ⓒ 판필름 All rights reserved.), 공포의 외인구단(ⓒ 판필름 All rights reserved.), 까치의 날개(ⓒ 이현세. All rights reserved.), 소설 공포의 외인구단(ⓒ 오늘 출판사. All rights reserved.), 2009 외인구단(ⓒ ㈜그린시티픽쳐스,㈜윌비컴, MBC. All rights reserved.)
* [이장호의 외인구단] 개봉당시 자료사진은 자료제공: 네이버 블로거 양덕진님의 동의하에 사용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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