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늘 미지의 병원체와 싸워왔다. 중세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흑사병이나 1차 세계대전 당시 조류 독감의 일종인 스페인 독감, 1990년대 화두가 되었던 에볼라 바이러스, 그리고 최근에는 사스라는 질병 등은 치료법이 개발되기까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작년에는 실체가 분명치 않은 '광우병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시끄럽지 않았는가.
이처럼 미지의 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대비책이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가깝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병원균에게 조차 맞서지 못하는 인류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이하 블레임)은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에 붕괴되어가는 일본의 모습을 가상으로 구성한 재난영화로서 [일본침몰]과 더불어 항상 자연재해에 노출된 일본인들의 자아를 드러낸 또하나의 작품이다. 어찌보면 볼프강 피터슨 감독의 [아웃 브레이크]나 혹은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와 유사한 패턴을 가진 영화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오락적 요소가 강한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블레임]은 드라마적인 부분에 보다 초점을 맞췄다. 어쩌면 [블레임]이 평단과 관객의 혹평세례를 받는 이유가 재난영화=오락영화라는 기대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그 점은 차차 살펴보도록 하자)
ⓒ Toho Company/Tokyo Broadcasting System (TBS) All rights reserved.
영화속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이름이 '블레임 (Blame)'이라는 점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즉, 영화속에서 '블레임'은 신의 저주 혹은 벌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질병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하는 공통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주의: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을 수 있음
실제로 이 바이러스의 원인이 조류독감이라는 매스컴의 발표 때문에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지 못한 양계장 주인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양계장집 딸이 학교에서 학우들의 근거없는 '비난'에 시달리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최초의 감염자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는 초진을 맡았던 주인공을 '살인자'라며 '비난'하지만 역학조사가 들어오자 자신(혹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 '비난'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해 몰래 병원을 빠져나간다. 주인공 츠요시는 초진에서 감염체를 발견하지 못한 스스로를 '비난'하며 괴로워 한다.
이처럼 재앙에 직면한 인간들의 모습은 누군가를 비난하며 그 가운데서 또다른 희생자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약한 존재인 것일까? [블레임]은 궁극적으로 전염병에 노출된 다양한 군상을 묘사해 극도의 혼돈과 절망적인 상황을 다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표현하고자 한 듯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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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임]은 영화 초반 원인모를 전염병의 발병과 확산, 그리고 역학조사를 위해 중앙 아시아의 한 섬을 찾아가는 과정을 비교적 타이트하게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운 건 여기까지. 질병의 발원지까지 찾아낸 이후에 영화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잃어 버린다. 질병의 해법은 없고 책임자를 색출하는 과정도 없다. 이미 영화의 서두에서 줄창 보여준 병동의 혼란과 절망만이 되풀이 될 뿐이다.
여기에 뜬금없는 멜로코드가 덩달아 끼어 들면서 가뜩이나 루즈해져가던 템포는 완전히 주저 않는다. 특히나 최루성 멜로장르에 유독 강세를 보여주던 일본영화의 특성을 생각하면 관객들의 실소를 유발시키는 신파극이 이번 [블레임]과는 얼마나 엇박자를 이루는지를 굳이 강조안해도 될 듯하다. 결국 후반부의 멜로코드는 어이없는 결말로 이어져 영화의 만듦새를 완전히 바꿔놓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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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너무 많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플롯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것도 문제다. 영화의 목적이 애초에 다양한 군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다양한 인물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연출력이 감독에게는 없는 듯 하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본질을 재난 블록버스터로 포장된 메디컬 드라마라고 이해하는 것이 관람에 임하는데 있어서 보다 정신적 충격을 덜어주는 방법일런지도 모르겠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배경이며, 주인공들도 대부분 의사나 간호사라는 점이 그 점을 뒷받침한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도 미지의 질병에 대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의료진의 자괴감과 희생정신이다. 물론 이같은 휴머니즘적인 요소마저도 비틀거리는 플롯에 의해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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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수입된 [블레임]은 완성본에서 약 20분정도가 삭제된 버전이다. 따라서 '최악'이라는 단어를 붙일만큼 [블레임]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다. 실상 필자가 [블레임]을 관람하게 된 동기는 한가지. 작년 그 어떤 영화보다도 인상깊게 봤던 [매직 아워]의 두 주역, 츠마부키 사토시와 사토 코이치가 출연하기 때문이었으나 이 훌륭한 배우들 마저도 기대치를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상투적인 헐리우드 엔딩을 지향하지 않은 점은 [블레임]의 유일한 미덕이긴하나, 전체적으로는 작품속 어색한 일본 배우들의 영어대사만큼이나 이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P.S: 리뷰를 올린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한국 수입사인 KTH가 20여분간을 임의 삭제하고 엔딩을 바꿔 일본의 TBS사가 법적대응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사태가 심각해질것을 우려한 KTH는 3월 4일부터 완전판을 상영하기 시작했다는데, 필자는 하루전날인 3일날 관람을 마쳤다. 제발 수입사는 개봉하기 전에 개념부터 챙기시길. ㅡㅡ;;
*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Toho Company/Tokyo Broadcasting System (TBS).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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