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마의 단백질 커피]는 얼핏보면 셀마라는 소녀가 어느 나른한 오후에 창가에 앉아 특이한 재료를 넣은 커피를 마시는 연상시키는 제목이지만 실은 세 편의 단편 애니를 옴니버스식으로 엮은 독립 애니메이션이다. 셀마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원티드], 흔히 풍부한 단백질 양식으로 알려진 닭고기와 관련된 에피소드인 [사랑은 단백질], 그리고 '커피 자판기'와 한 소녀의 사랑을 담은 [무림일검의 사생활]로 이루어진 각각의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원티드
안젤리나 졸리의 [원티드]가 아니다. 뛰어난 작화를 자랑하는 [원티드]는 세 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뚜렷한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다. 모두가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조그만 마을. 매연을 잔뜩 뿜어대는 경찰차를 타고 다니는 경관이 현상수배범의 포스터를 들고 마을 사람들과 얘기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차의 매연 때문에 짜증을 내기 일쑤다.
ⓒ Electric Circus All rights reserved.
그런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기분나쁜 노파가 음울한 기운을 몰고와 마을을 가로질러간다. 그 할머니가 지나간 직후에는 마을에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그녀의 이름은 '셀마'. 바로 그 경관이 들고다니던 현상수배범이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그녀가 지나간 다음에는 폭우가 몰아쳐 마을은 홍수가 나고 수재민이 된 마을 사람들은 조그만 배에 몸을 맡긴채 정처없이 표류한다.
[원티드]는 사회 비판의 강도가 꽤나 높은 작품이다. 스포일러상 그 노파의 정체가 무엇인지 굳이 밝히지는 않겠지만 수십년간 반복되어 온 한국 정부의 무능한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만큼은 꽤나 통렬하다. 서스팬스와 풍자적 메시지가 잘 조화된 수작으로서 세 편의 애니메이션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2.사랑은 단백질
이 작품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로 알려진 최규석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로토스코핑 기법을 사용해 만든 작품이다. 자취 생활을 하는 세명의 남자. 이 중 키득키득 웃기만 하는 괴상한 사내가 문득 치킨이 먹고 싶다며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른다. 치킨집에 주문을 넣고 기다리니 잠시후 족발집의 돼지사장이 멋적은 듯 통닭을 배달하러 온다. 그런데 먼 발치에서 치킨집 닭사장이 울먹거리며 전달하는 통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이제 그 통닭에 얽힌 닭사장의 피눈물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펼쳐진다.
ⓒ Studio Dadashow. All rights reserved.
[사랑은 단백질]은 관점에 따라선 매우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고기를 먹고 사는 (즉 단백질을 섭취하는)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주체를 각각의 동물들로 의인화 시킨 점은 초현실적이지만 어쩌면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먹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일런지도 모른다. 더불어 '양심'에 대해 생각해 보는 작품으로서 뒷맛이 개운치만은 않다.
3.무림일검의 사생활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밝은 톤의 이 애니메이션은 과거 무림의 고수였던 진영영이 현대의 커피 자판기로 환생했음에도 여전히 과거의 적들과 싸움을 벌이는 삶을 그린 일종의 무협판타지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초점은 무림고수의 활극이 아니라, 혜미라는 소녀와의 사랑이다. 술만 마시면 동정심이 발동하는 엉뚱한 소녀인 혜미가 어느날 길에 세워진 커피 자판기(진영영)를 자기 방에 끌어오면서 시작된다. 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휘말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내던 자판기는 어느덧 혜미의 순진무구함에 빠져들면서 그녀에게 애정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 Animation Studio 지금이 아니면 안돼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한편의 동화같은 이야기이지만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사랑스러우며, 유머가 풍부하다. 이미 2007년 10월에 SBS를 통해 한차례 방영된 적도 있었는데 아마 많은 분들을 모르고 넘어가셨을 듯. 작화 수준은 위의 두편에는 못미치지만 그럼에도 스토리의 참신성과 기발한 아이디어 덕택에 관객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을 것 같은 작품이다. 몇일전 열린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단편부문 특별상, 관객상을 수상하며 2관왕을 차지했다.
[셀마의 단백질 커피]는 단편 독립 애니메이션이 극장 개봉하기 힘든 현실을 고려해 옴니버스 구성이라는 방법을 빌려 가까스로 개봉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관객들이라면 한번쯤 우리 애니메이션의 참신함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보자. 위의 세 작품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주옥같은 작품들이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만든다. 비록 상업 애니메이션과 절대적인 비교는 힘들겠지만 독립작품들도 무시못할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 보시길.
* [셀마의 단백질 커피]는 현재 INDIE SPACE에서 개최하는 인디파르페 기간중에 관람이 가능하다.
* [셀마의 단백질 커피]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Electric Circus(일렉트릭 서커스), Studio Dadashow(스튜디오 다다쇼), Animation Studio 지금이 아니면 안돼, KOCCA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에 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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