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유명무실해졌으나 한때 헐리우드의 주류를 점령했던 장르가 있었으니, 이른바 '웨스턴 무비'. 우리말로 서부영화라고 불리웠던 장르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다룬 장르인 '웨스턴 무비'는 보안관, 현상범, 무법자, 인디언, 총잡이 등이 단골 소재로 등장시킨 영화였다. 존 포드로 시작해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 그리고 비교적 현대에 들어와서는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보여준 사실주의 웨스턴에 이르기까지 서부영화는 미국인들의 거칠고 투박한 내면을 담아낸 자아상을 보여준 아이콘이었다.
대부분의 서부영화에서는 선과 악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마지막에 악당이 주인공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뻔한 결말로 이끄는 도식화된 스토리를 가졌지만 이 스토리가 유독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은 그 안에 담겨진 백인 우월주의, 즉 악당은 대부분 멕시칸 아니면 인디언이고 그들을 쓰러뜨리는 주인공은 하나같이 미간에 잔뜩 인상을 쓴 아메리칸 히어로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이 악당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화되며 반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멋모르고 서부영화에 열광한 초기 웨스턴 매니아들에겐 그저 통쾌한 오락영화에 지나지 않았을런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같은 내용의 서부영화는 의식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반감을 사게 되는데, 이런 자아도취적인 흐름을 깬 것이 이른바 수정주의 웨스턴이라는 장르다.
앞서 언급한 편협한 서부영화의 흐름을 주도했던 존 포드 감독이 내놓은 [수색자]는 자신이 벌여놓은 오류를 과감하게 수정해 나가는 파격적인 줄거리로 서부영화를 재해석한 획기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웨스턴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거쳐 셈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변화를 시도해가며 꺼져가는 웨스턴 무비의 불꽃을 살려갔으나 사실상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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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백인 우월주의적 성향을 고쳐나간 수정주의 웨스턴의 시작, [수색자]
한편 웨스턴 무비가 한창 인기를 끌 당시 한국의 영화계는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가? 1960년대 이후 한국 영화계는 다양한 액션장르를 선보이며 당시 인기를 끌던 외국 영화들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한국 영화의 중흥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1960년대 중반이후 국내에 수입된 외화들을 살펴보면 크게 3가지 흐름으로 대변된다. 하나는 007 시리즈를 중심으로 한 첩보물, 두 번째는 호금전, 장철 감독으로 대변되는 홍콩 무협물, 세 번째가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로 시작된 무법자 시리즈, 즉 마카로니 웨스턴의 열풍이었다.
이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이른바 '코리언 웨스턴'. 다른 말로 만주 웨스턴이라고 부르는 하위장르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무국적(無國賊)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점과 유사하게 만주 웨스턴은 말 그대로 한국땅이 아닌 만주 대륙이라는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이에 더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초적인 캐릭터 상과 시니컬한 이미지마저 주인공에게 그대로 반영한 일련의 작품들은 한동안 남성관객을 중심으로 제법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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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로니 웨스턴의 대표적인 영화, [석양의 무법자]
특히 만주 웨스턴은 일제치하의 독립운동을 다룬 만주대륙물의 초기 작품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주인공들은 대부분 독립운동가이거나 독립군을 지원하는 '정의의 사나이'같은 인물들이 주를 이뤘다. 이들에게 있어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은 당연히 일본군이던가 마적패같은 악인이었다. 무정부주의적인 일제시대 만주 벌판의 시대상은 '무법자'들이 활개를 치는 마카로니 웨스턴 속 시대상과 묘한 대칭을 이루면서도 국적불명 퓨전 장르의 공간적 배경으로는 안성마춤인 셈이다.
만주 웨스턴의 원형은 1960년대 초 정창화 감독의 작품을 중심으로 저변을 확대한 만주 대륙물, 즉 독립군을 소재로 한 활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평선], [대평원], [소만국경] 등의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이다. 여기에 마카로니 웨스턴의 색체와 홍콩 무협물의 다채로운 설정이 복합적으로 가미되면서 만주 웨스턴은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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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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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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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1961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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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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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훈, 황정순, 황해, 장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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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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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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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1963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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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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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훈, 장동휘, 곽규석,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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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만주 웨스턴은 신상옥 감독의 [무숙자], 임권택 감독의 [황야의 독수리], 김시현 감독의 [석양의 하르빈] 등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어 오면서 1971년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로 정점에 이른다. 특히 [쇠사슬을 끊어라]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를 벤치마킹하여 3인의 캐릭터에 대립각을 세우는 이야기 구조로 입체적인 인물들과 플롯을 전개해 나간 작품으로서 만주 웨스턴 영화중에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은 바로 이 작품에 기초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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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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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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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1968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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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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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최은희, 최성호, 김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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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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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 만주 웨스턴은 쇠퇴기에 접어드는데, 장르 자체가 딱히 뭐라 규정하기 힘든 잡종교배식의 모호한 성격을 가진데에다 B급의 영역을 넘기 힘든 식상한 패턴으로 인해 이들 만주 웨스턴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태생적 한계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했다.
비록 오락물로서의 만주 웨스턴은 대륙을 배경으로 한 스팩터클과 적절한 액션이 혼합된 이국적인 장르이긴 했으나, 당국의 규제가 엄격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순수 오락물로서가 아니라 닭살돋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적 색체가 군데군데 남아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이번에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은 과거 만주 웨스턴에 대한 오마주임과 동시에 당시의 국내여건상 부족했던 제작환경과 창작의 표현을 극대화 시킨 오락물이 될 것으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두고봐야 하겠으나, 이를 계기로 잊혀진 우리 영화의 장르가 새롭게 조명받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긍정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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