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겪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빈치가 그림 속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을 찾아 방황하던중 때묻지 않은 19세의 목동을 발견해 그를 모델로 예수를 그렸다. 그로부터 6년 뒤 다빈치는 11명의 제자를 그리고나서 나머지 1명,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당시 로마 시장의 권유로 로마의 사형수 감옥을 방문하게 된 다빈치는 그곳에서 악의 화신같은 한 살인범을 발견했고, 그를 모델로 유다의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이 완성된 순간 다빈치는 사형수의 이 한마디에 경악하고 만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아뭏든 꽤나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변신은 언제나 새롭다. 익숙해진 이미지가 한순간에 변했을 때 다가오는 이질감은 때론 신선하면서도 때론 거북하다. 영화배우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가지 이미지에 너무 집중되었다 싶을 때 과감한 연기변신을 통해 새롭게 조명받는 명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인기가 없으니 별짓을 다한다는 혹평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연기자들의 악역변신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 한 배우에서 선과 악의 양면성이 모두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은 그 배우가 가진 연기의 폭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를 가장 쉽게 짐작케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에 악역변신을 시도한 15명의 대표적인 배우들을 꼽고 약간의 설명을 붙이기로 했다.
순위는 편의상 붙인 것이며 연기력의 우열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힌다. 또한 다수의 악역출연을 했던 배우들은 제외시켰다.
1.로렌스 올리비에 (마라톤 맨: Marathon Man, 1976) -닥터 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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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전범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음모를 다룬 스릴러에서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는 생애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다. 이 당시 그는 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음에도 오랜만에 돌아온 배역 제의에 흔쾌히 찬성해 노년기 최고의 명연기를 선보였다. 더스틴 호프만을 의자에 앉히고 "Is it safe?"라는 대사를 반복하며 차갑게 노려보는 그 무시무시한 표정연기는 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장면으로서 77년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의 영예를 안겼다.
2.그레고리 펙 (잔혹한 음모: The Boys From Brazil, 1978) -닥터 멩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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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레빈의 추리소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을 각색한 이 작품에서 그레고리 펙은 가공할 만한 생체실험을 통해 제3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나치전범으로 변신했다. 원작에 비해 영화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이지만, 늘 정의파 역할만 맡아온 그레고리 펙의 연기 변신이 새롭다. 상대역인 로렌스 올리비에가 2년전에 나치 전범으로 악역에 도전한 것과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
3.숀 코네리 (어벤저: The Avengers, 1998) - 어거스트 드 윈터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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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잘 생긴 외모와 더불어 호남형 캐릭터로 자리잡은 숀 코네리가 동명의 TV시리즈를 리메이크한 [어벤저]에서는 기상이변을 무기로 세계정복에 나서는 미치광이 과학자 역을 맡았으나, 영화 자체의 유치찬란함 덕택에 큰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숀 코네리의 연기도 별다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함으로서 연기 변신에는 사실상 실패했다.
4.덴젤 워싱턴 (트레이닝 데이: Training Day, 2001) -알론조 경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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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 경관이 부패 경찰인 고참을 만나 하룻동안 순찰훈련을 다니는 내용을 다룬 영화로, 뜻밖에도 덴젤 워싱턴이 부패 경찰인 알론조 역할을 맡았다. 다른 액션영화와 크게 차별성은 없는 범작이지만 생애 최초로 악역에 도전한 덴젤 워싱턴이 보여주는 연기는 카리스마의 결정체다. 덕분에 덴젤 워싱턴은 시드니 포이티에에 이어 흑인배우로는 두 번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성공적인 연기변신의 대표적인 케이스.
5.모건 프리먼 (드림캐쳐: Dreamcatcher, 2003) -에이브러햄 커티스 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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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늘 멘토(Mento)의 이미지를 풍기는 모건 프리먼은 그 누구보다도 악역과 가장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생각하기도 끔찍한 완성도의 영화 [드림캐쳐]에서 외계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광기어린 군인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워낙 허접하기도 하거니와 역시나 모건 프리먼이라는 배우는 악역에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입증한 꼴이 되고 말았다.
6.해리슨 포드 (왓 라이즈 비니스: What Lies Beneath, 2000 -닥터 노만 스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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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배우로서는 드물게 지적인 이미지까지 갖춘 해리슨 포드는 최근들어 하향세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그의 후기작 중 유일하게 성공한 작품이 [왓 라이즈 비니스]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고가는 악랄한 남편역할을 맡았다. 물론 영화 초반까지도 이런 해리슨 포드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드나, 중반부터 드러나는 그의 묘한 악의 기운은 이 영화를 흥행시키는데 적어도 한부분을 담당했다고 보여진다.
7.이연걸 (리썰웨폰 4: Lethal Weapon 4, 1998) -와 싱 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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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홍]으로 재기에 성공한 아시아의 대표적인 액션스타 이연걸의 헐리우드 진출 데뷔작. 원래는 [리썰웨폰4]에서 멜 깁슨과 버디를 이루는 동양인 형사역으로 출연할 계획이었으나, 시놉시스가 변경되면서 악역으로 바뀌었다. 동양의 거물급 배우를 단순 악역으로 전락시킨 헐리우드의 꼼수에 대해 많은 비난이 있었으나 의외로 이연걸이란 배우에게 악역이 어울린다는 사실또한 발견하게 해준 면에서 의미가 깊다.
8.더스틴 호프만 (후크: Hook, 1991) -후크 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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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연기의 스팩트럼이 다양한 더스틴 호프만이지만 정식으로 악역에 도전한건 이번이 처음인 듯. 스티븐 스필버그의 야심작 중 하나인 [후크]는 로빈 윌리암스, 줄리아 로버츠, 밥 호스킨스 등 초호화 캐스팅이 동원되었으나 더스틴 호프만이 맡은 후크 선장의 이름이 타이틀로 쓰일만큼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전연령을 대상으로 한 영화여서 후크 선장이 그다지 악랄하지 않다는 것이 특징.
9.다니엘 데이-루이스 (갱스 오브 뉴욕: Gangs Of New York, 2002) -도살자 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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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미지의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악역에 도전한 건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 로버트 드 니로의 불참 때문이다. [순수의 시대]에서 이마 스콜세지와 호흡을 맞춘적이 있는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차선책으로 선택되어 [갱스 오브 뉴욕]에서 무시무시한 광기를 발산하는 도살자 빌 역할을 맡았는데, 처음 도전하는 악역임에도 그의 눈빛부터 몸짓하나하나가 그 역할에 적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의안인 한쪽 눈알을 칼로 톡톡 두드리며 얘기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
10.톰 크루즈 (콜래트럴: Collateral, 2004) -빈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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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으로 알려진 마이클 만의 [콜래트럴]은 미남 배우 톰 크루즈가 악역을 맡는다고 하여, 처음부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냉혹하지만 고독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독특한 캐릭터로 분해 열연을 펼친다. 상대역인 제이미 폭스와의 호흡이 워낙 좋아서 상승효과를 탄 것도 있겠지만, 첫 악역연기치고는 너무나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11.케빈 코스트너 (3000 마일: 3000 Miles To Graceland, 2001) -토머스 J. 머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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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분장대회에 참석한 악당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워터월드]와 [포스트맨] 이후 재기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 케빈 코스트너가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역시 흥행과 비평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뤘다. 다분히 영웅적인 캐릭터를 선호하는 그로서는 그간의 이미지를 한번에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훗날 [미스터 브룩스]로 다시한번 악역에 도전했을 때는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았다.
12.아놀드 슈왈제네거 (배트맨 앤 로빈: Batman & Robin, 1997) -미스터 프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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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불패의 프랜차이즈 [배트맨] 시리즈의 4번째 작품으로서, 슈퍼스타를 악역으로 캐스팅하는 [배트맨]의 특성상 많은 배우들이 탐냈던 배역이다. 특히 아놀드와는 좋은 라이벌인 실베스터 스탤론도 탐냈을 정도로 성공이 보장된 캐릭터였으나, 누가 이 악역을 맡았건 재앙에 가까운 혹평은 면치 못했을 듯. 특히나 '아놀드 급의 초특급 배우가 악역을 맡으면 영화속에서도 죽이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변칙적인 결말을 내놓은 탓에 많은 비판을 들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터미네이터] 이후 또한번 악역에 도전한 셈이었으나 그의 이름을 전면에 앞세운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13.실베스터 스탤론 (스파이 키드 3: Spy Kids 3-D: Game Over, 2003) -토이메이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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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슈왈제네거 처럼 무엇인가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은 하지만 뜻대로 잘 안풀리는 또한명의 배우가 실베스터 스탤론이다. [배트맨 앤 로빈]에서 미스터 프리즈 역을 따내는데 실패한 뒤에,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스파이 키드]의 세 번째 작품에서 악역을 맡았다. 여기서 그는 어린이들을 괴롭히는 어이없는 악역을 맡았는데, 상대역이 안토니오 반데라스인 것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과거 스탤론이 잘나가던 시절, [어쌔씬]이란 영화에서 스탤론은 주인공으로, 반데라스는 악역으로 나왔기 때문. 뒤바뀐 그들의 입장을 보면 세월이란 참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것 같다.
14.안성기 (인정사정 볼 것 없다: Nowhere To Hide, 1999) -장성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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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배우로 시작해,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국민배우로 자리잡은 안성기. 그런 안성기도 악역에는 그다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그는 냉혹한 살인을 저지르는 장성민 역을 맡아, 최고의 악역 연기를 선사한다. 박중훈과의 빗속 격투장면은 한국 영화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명장면으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3]에서도 차용된 바 있다.
15.로빈 윌리암스 (인썸니아: Insomnia, 2002) -월터 핀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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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소년같은 웃음과 선한 이미지로 출연했던 로빈 윌리엄스가 알 파치노를 상대로 연쇄살인마를 열연했다. 알 파치노의 직무중 오발사고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으로서 그와의 심리게임을 즐기는 묘한 캐릭터로 비록 엄청난 마력을 지닌 악역은 아니더라도, 사이코패스적인 살인범의 역할을 무난히 소화해냈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보니 웬만한 명배우들은 한번씩 악역을 맡아본 것 같다. 이외에도 로버트 드 니로나 게리 올드만 같이 악역을 전문으로, 혹은 자주 맡는 배우들도 있지만 여기서는 어쩌다 한번 "변신"을 시도한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컨셉을 잡았다. 써놓고보니 직업이 "의사"인 경우가 월등히 많은데, 역시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닥터'와의 차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한 것일까?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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