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빙의 맛 No.1
영화 [록키]는 설명이 필요 없는 수작이면서도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을 헐리우드 스타로 만들어 준 유명한 영화입니다. 스탤론은 분만 당시 의료진의 실수로 안면 마비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얻는 바람에 발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의 어눌한 말투는 사실 연기라기 보단 그의 장애로 인한 핸디캡인 것이죠.
그런데 [록키]의 캐릭터인 록키 발보아는 각본을 쓴 스탤론이 자기 자신을 영화 속에 투영한 덕분인지, 그러한 장애가 배우로서 전혀 흠이 되지 않는 캐릭터의 일부분으로 승화됩니다. 오히려 반듯하고 똑부러지게 발음을 하는 록키라면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 이 작품을 명화극장을 통해 접했습니다. 당시에는 (故)정영일 씨라고 1세대 영화평론가로 유명했던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랜덤하게 방송에 나와서 이번주 명화극장 선정작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그 코너에서 “이번주 명화극장은 [로키] (록키 아님!) 입니다.”하는 걸 보고 부모님이 꼭 보자고 하시더군요. 대단한 영화라면서… ㅎㅎ
이 작품의 첫 지상파 방영 당시 록키 발보아 역은 이정구 성우가 맡았습니다. 이게 또 재미있는 비하인드가 있는데… 원래 이정구 성우는 이 역할을 자신 없어 했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이정구 성우하면 액션 배우 전문 성우로 인식이 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거 없었던 데다 그간 이정구 성우가 해 왔던 역할은 미성의 주인공이라서 캐릭터의 성격이 많이 달랐고, 스탤론의 원래 목소리가 너무 로우톤이라 재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고….
그럼에도 더빙 전날 일부러 목을 혹사시켜 음색을 조금 거칠게 만든 상태에서 녹음을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실베스터 스탤론=이정구 성우 전담이라는 공식을 탄생시킨 것이지요.
워낙 명장면이 많은 영화이지만 그 중 한 장면을 꼽는다면 록키와 애드리안이 첫 데이트를 하는 스케이팅 시퀀스인데요, 굉장히 사랑스러운 장면이죠. 여기서 록키는 어설프게 스케이트를 타는 애드리안을 따라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Am I talking too loud?” 라고 멋적게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정구 성우의 “내 목소리가 너무 커요?”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스탤론이 직접 한국어를 하는게 아닌가 싶은…..
그 외에도 애드리안을 외치면서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의 싱크로도 가히 후덜덜한 수준이어서 이제는 스탤론 영화에 이정구 성우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앞으로도 이정구 성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을 거 같습니다.
한편 탈리아 샤이어가 맡은 히로인 애드리언 역은 장유진 성우가 맡았는데, 나중에 또 다룰 일이 있겠습니다만 이 분은 메릴 스트립과 오드리 햅번의 전담 성우이자 도날드 덕의 성우로도 유명한 만큼 천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평가를 듣는 베테랑이죠. 이 작품에서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여성에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당찬 여성으로 변모되는 미묘한 캐릭터의 변화를 새심하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록키의 상대역인 아폴로 역에는 (故) 엄주환 성우가 캐스팅 되었는데, 이 덕분인지 이 후로도 [록키 2]와 [프레데터]의 방영시에도 칼 웨더스의 목소리를 전담하게 됩니다.
[록키] 시리즈에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 애드리안의 오빠이자 록키의 친구인 폴리 역은 노민 성우가 맡았습니다. 노민 성우는 [날아라 슈퍼보드]의 저팔계 역으로 유명하고, [판관 포청천]의 포청천, [카우보이 비밥]에서는 암살자 통푸 역할로도 알려졌는데, 이렇듯 작고 통통한 캐릭터를 전담하게 된 것도 실은 이 [록키]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록키]는 수많은 외화의 홍수 속에서도 초월더빙을 논할 때 처음으로 떠올리게 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80년대 외화 더빙의 경우는 오늘날과는 달리 성우 개개인의 연기가 상당히 개성이 넘쳤는데다가 연출 방향도 많이 달랐어서 지금 들으면 다소 오바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매력넘치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록키] 최초 방영 정보 : 1985.07.28 (일) KBS1 명화극장
성우 캐스팅: 이정구, 장유진, 엄주환, 김병관, 송두석, 노민, 김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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