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 무비
외계행성 클립톤 출신의 칼-엘은 고향별의 멸망 직전 지구로 보내져 지구인 클락 켄트로 성장함과 동시에 슈퍼맨이라는 슈퍼히어로로서의 이중 아이덴티티를 갖게 된다. 그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인류를 수호하는 슈퍼맨의 역할을 떠맡게 되지만 결국 사랑에 빠진 로이스 레인과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가진 슈퍼파워를 포기하게 된다.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소중한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딜레마는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 2]를 관통하는 테마이자 주제의식이었다. 관객들은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슈퍼맨이 식당에서 건달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 장면을 보며 마음 아파했고, 그렇게 슈퍼히어로가 짊어지고 있는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본래의 정체성을 다시 되찾아가는 여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DC Films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원더우먼]의 속편 [원더우먼 1984]는 전편과 다른 세계관의 리부트라는 루머에서부터 (사실 이 부분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과의 설정오류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대놓고 잭 스나이더의 세계관을 배제한다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코로나19로 인한 개봉연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말들이 오고 갔던 작품이지만 팬들의 관심사는 아마도 전작에서 리타이어한 스티브 트레버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재합류할 것인가에 쏠렸을 것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슈퍼맨 2]가 취했던 서사와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전작에서 스티브 트레버 일행과 함께 아레스를 물리친 원더우먼은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고고학자 다이애나 프린스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다. 가끔 슈퍼히어로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구해주곤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녀의 실제 삶은 외롭고, 고립되어 있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다이애나와는 달리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직장동료 바바라 미네르바가 무엇이든 소원을 이뤄주는 고대 유물을 손에 넣으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늘 자신 곁에 두고자 갈망했던 존재, 스티브 트레버가 다이애나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꿈에 그리던 행복을 되찾은 것도 잠시, 다이애나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능력이 점점 소멸되어 간다는 것을 느낀다.
설상가상으로 유물의 존재를 일찌감치 알고 있던 사업가 맥스웰 로드와 유물로부터 소원을 얻어낸 미네르바가 그 힘을 오용하면서 세계는 큰 위험에 직면하고, 이타적인 인류애를 최우선 가치관을 삼는 다이애나에게 사랑하는 연인의 생명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이 찾아오게 된다.
제목에 붙은 ‘1984’ 숫자가 의미하듯 [원더우먼 1984]는 고전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 무비에 가까운 영화다. 서두에서 언급한 [슈퍼맨 2]의 딜레마를 그대로 차용한 것과 더불어 80년식 영화의 색감과 연출방식까지 고스란히 가져 온 탓에, 현란한 비주얼과 스타일리시한 액션, 세련된 슈퍼히어로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무척 당혹스러울 수 있다. 특히나 최근 공개된 [저스티스 리그: 스나이더 컷]의 전투머신 같은 원더우먼과 비교해보면 액션의 임팩트가 전무하다는 점은 장르물로서의 심각한 결함이기도 하다.
△ 전작에서 호평받은 크리스 파인이 연기한 스티브 트레버가 이번엔 다이애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장치로 한정되어 버린 탓에 영화 내내 묘한 불편함을 주며, 이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원더우먼의 딜레마에 쉽게 공감하기가 힘들게 만든다. 사실 스티브는 다이애나의 눈에만 ‘스티브 처럼’ 보일 뿐, 본체는 생면부지의 ‘다른 남성’이며 만약 동일한 상황에서 남녀의 성별을 치환시켜 보면 상황은 더욱 불편한(불쾌한) 지점으로 가게 된다.
문제는 추억의 소환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시대의 식상한 세계관과 캐릭터의 빌드업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데에 있다. ‘원더우먼’의 신화적 메타포를 현대적으로 잘 각색한 [원더우먼]과는 달리 뻔한 전개와 주제의식을 설교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갈만했던 전작의 올드한 단점들을 더욱 증폭시킨 결과로 나타난다.
물론 단점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레트로 스타일을 지향하는 [원더우먼 1984]의 의도를 좋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나름대로 장점이 될 수 있는 부분들도 많다. 1980년대 풍요로운 미국의 시대상은 잘 재현되어 있으며, 갤 가돗의 원더우먼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나 쿠키를 포함해 TV 시리즈 [원더우먼]에 대한 다양한 오마주들을 보노라면 이 시절에 대한 갬성이 돋는 관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욕심꾸러기는 벌을 받게 되는 흔한 동화책을 읽듯이 너무나 순리적으로 진행되는 그런 촌스러운 고전영화처럼 [원더우먼 1984]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 더 심심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감독이 말하려는 바는 충분히 전달되었을지언정 그 가르침이 관객에게 큰 울림을 주지는 않는다.
블루레이 퀄리티
[원더우먼 1984]는 러닝타임 전체를 필름으로 촬영한 작품으로 약 20분간의 IMAX 70mm 촬영분이 오프닝과 엔딩신에 사용되었고, 나머지 분량은 모두 35mm 필름 촬영분으로 이뤄져 있다. (전작은 35mm 필름과 아리 일렉사 65 디지털 카메라를 조합했다) 따라서 모처럼 필름의 아날로그 적인 질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80년대 특유의 화면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과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레인이 느껴지는 영상을 특징으로 한다. 평균 비트레이트는 21 Mbps로 전작과 비슷한 수치.
컬러는 다분히 고전적인 입맛에 맞춰진 과감한 색조를 도입했고, 밤 장면과 조명이 낮은 장면에서도 깊고 풍부한 블랙 레벨과 암부의 디테일이 훌륭한 균형감을 유지하는 편이다. 배우의 피부톤과 황금 갑옷의 표면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표현력 또한 우수하다. 다만 몇몇 장면에서 손실 압축 아티팩트가 발견되나 문제가 될만한 수준은 아니다.
돌비 애트모스를 채용한 사운드는 진정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액션이 풍부한 영화는 아니지만 오프닝의 데미스키라 시합 장면과 쇼핑몰 액션신, 사막 추격전 등 청음자를 감싸는 서라운드 채널의 패닝 효과가 일품이다. 대화는 프론트 채널에 집중하도록 자연스럽게 주의를 이끌며, 혼잡한 사운드에서도 배경음에 묻히는 일 없이 또렷하게 전달된다.
스페셜 피처
메인 부가영상인 ‘The Making of Wonder Woman 1984: Expanding the Wonder’는 약 30여분에 달하는 메이킹 영상으로서 감독이 왜 시대배경을 1984년으로 잡았는지에 대한 설명부터 영화 전반에 걸친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다. 페티 젠킨슨 감독은 [원숭이의 손 The Monkey's Paw] (주: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의 단편 소설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원숭이 손을 얻은 사람의 집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다룬다)이란 공포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 시대에 이 내용을 적용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Gal & Kristen: Friends Forever’는 원더우먼의 아치 에너미이자 본작의 서브 빌런으로 등장하는 바바라 미네르바와 다이애나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영상이다. 참고로 치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바바라 역에는 크리스틴 위그가 캐스팅되었는데, 평소 코믹한 이미지로 더 알려져 있지만 정극 연기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배우인 만큼 빈약한 플롯에서도 캐릭터를 잘 소화해 냈다. 다만 서브 빌런으로서의 역할 자체가 한정적이어서 조금은 아쉬웠던 캐릭터이기도 하다. 어쨌든 본 부가영상에서는 영화 상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크리스틴 위그의 (평소대로의) 코믹한 모습이 여지없이 등장하므로 꼭 감상하시길 바란다.
‘Gal & Krissy Having Fun’는 갤 가돗과 크리스틴 위그의 몸 개그가 작렬하는 보너스 영상이다. 의외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의 코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Small But Mighty’는 오프닝의 데미스키라 시합 장면에 대한 부가적인 해설이 담겨 있다. 원작에서도 워낙 유명한 장면이라 전작인 [원더우먼]에 넣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걸 넣을만한 자리가 없어서 훗날을 기약했다는 후문이다. 다이애나의 아역으로 출연한 릴리 아스펠의 깜찍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심지어 대역 스턴트 없이 혼자 액션을 다 소화했다고 한다.
스페셜 피처 목록
• The Making of Wonder Woman 1984: Expanding the Wonder (36:23)
• Gal & Kristen: Friends Forever (05:10)
• Small But Mighty (10:44)
• Scene Study: The Open Road (06:11)
• Scene Study: The Mall (05:03)
• Gal & Krissy Having Fun (01:12)
• Meet the Amazons (21:28)
• Black Gold Infomercial (01:38)
• Gag Reel (06:26)
• Wonder Woman 1984 Retro Remix (01:40)
총평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는 공식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 듯 했으나, [원더우먼 1984]는 아쉽게도 그러한 통념마저 과거의 가치관으로 돌려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워너로서는 원더우먼의 상품적 가치를 꽤나 높게 보고 있는 듯 하다. 여러 혹평 속에서도 패티 젠킨스 감독은 목표대로 [원더우먼] 3부작에 완성할 예정이며,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다이애나의 이야기로 시리즈의 피날레를 장식할 것으로 보인다. 부디 3편에서는 보다 강력하고 멋진 여전사로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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