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존재에서 오는 현실적인 공포
‘투명인간’. 경우에 따라서는 축복이자, 혹은 저주라고도 불릴 수도 있는 이 독특한 능력이 처음으로 대중 문화에 등장한 건 H.G 웰즈의 소설 ‘투명인간’을 통해서다. 필자는 이 소설을 중학교 때 접하게 되었는데 반쯤은 흥미위주의 SF소설이려니 생각하고 집었던 책이었지만 상황이 빚어내는 스산한 분위기와 비극적 결말이 주는 충격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소설은 1933년 제임스 웨일 감독에 의해 처음으로 영화화 되었고, 이후 코미디, 에로, SF등 각종 장르의 영화들에서 ‘투명인간’ 소재가 다양한 변주로 활용되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1987년 김기충 감독이 배우 이영하와 함께 [투명인간]이란 영화를 찍은 바 있다.
오늘날 대중적인 의미에서 좀 더 잘 알려진 작품을 꼽는다면 1992년 존 카펜더 감독의 [투명인간의 사랑]과 2000년 폴 버호벤 감독의 [할로우맨]일 것이다. 전자가 투명인간이 겪는 현상들을 통해 ‘투명인간으로서 사는 삶’에 집중했다면, 후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관음증적인 욕망에 초점을 맞춰 보다 자극적인 방향으로 소재를 활용했던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까지 다양한 투명인간 영화들이 소개된 가운데, 올 해 초 관객을 찾은 [인비저블맨]은 본래 2017년 [미이라]로 시작해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반 헬싱], [드라큘라], [울프맨]과 함께 이른바 다크 유니버스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에드 솔로몬이 각본을 쓰고 조니 뎁이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미이라]의 흥행부진으로 인해 (실은 그 이전작인 [드라큘라 : 전설의 시작]도 흥행부진으로 다크 유니버스에서 제외된 바 있다)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어 버렸고, 그 결과 스타급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제작비를 대폭 줄인 저예산 영화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호러 명가 블룸하우스에서 제작을 맡은 만큼, 원작이 지녔던 스산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잘 살려 현대적으로 영리하게 각색한 영화다. 기존 ‘투명인간’ 소재의 작품들과 다른 점은 투명인간 자체에 시선을 고정시키기 보다는, 피해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강박증적인 증세를 가진 여인을 내세워 보이지 않는 존재가 주는 공포를 관객이 함께 체감할 수 있도록 서사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관객은 투명인간의 존재가 실제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한 편, 여성이라는 약자가 겪는 현실적인 문제들–이를 테면 데이트 폭력이나 가스라이팅과 같은-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비현실적인 공포가 매우 그럴듯하게 와 닿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인간’이 소재임에도 허황된 SF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주인공 세실리아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 모스는 원맨쇼에 버금가는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데, 영화가 개봉한 이후 번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020년 영화들의 개봉일이 속속 연기되면서 내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유일한 후보이자 수상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스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렇듯 [인비저블맨]은 저예산으로 기획된 영화지만 조지 쿠커의 걸작 [가스등]를 연상시키듯 심리적 공포와 히스테리컬한 긴장감을 잘 유지시킨 작품으로 반전과 추리의 영역까지 흡수한 매우 잘 만든 장르물이라 생각된다.
블루레이 퀄리티
[인비저블맨]은 4.5K 소스 취득해 4K DI 처리한 마스터 포맷을 1080p로 트랜스퍼 시킨 고품질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디지털 촬영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 깨끗하면서도 정갈한 화면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가령, 오프닝의 탈출 장면에서는 전체적으로 조명이 낮은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적인 디테일이 선명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개밥그릇을 건드려 바닥에 미끄러지는 신을 보면 바닥의 작은 스크레치와 무늬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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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시퀀스에서의 암부 계조도 매우 우수한 편이며, 엘리자베스 모스의 화장끼 없는 얼굴에서 드러나는 잡티나 다크 서클까지도 명확하게 잡아내는 선명성을 유지한다. 색 재현력도 탁월한 편. 몇몇 장면에서 밴딩 현상이 살짝 스치듯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나 아주 미미한 부분이어서 이를 단점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민망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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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맨] 블루레이의 진가는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에서 드러난다. 후반부의 정신병동 시퀀스를 제외하면 그다지 임팩트 있는 갈렬한 사운드 효과가 등장하진 않지만, 카메라의 이동에 따라 저 멀리서 들려오는 주변음을 마주하면서 프론트에서 리어로 이어지는 이동감이 매우 두드러지며, 위치에 걸맞는 사운드의 배치가 세밀하게 구현되어 있어서 공간감과 방향감이 확실하게 체감되어 진다. 이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주인공의 심리상태와도 유기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사운드가 설계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보이지 않는’ 존재의 위협이 공포의 주체이니만큼 소리로 그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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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피처
우선 삭제장면을 보자. 꽤 많은 삭제장면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임스 부녀가 영화를 보고 집에 온 후에 벌어진 일을 보여준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의자를 응시하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다. 제임스가 우려스러운 듯 괜찮냐고 묻자 세실리아는 ‘그’가 살아있으며, 지금 의자에 앉아 있노라고 말한다. 이에 제임스가 직접 의자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시켜 주지만 자신의 의심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세실리아는 더욱 더 절망한다.
▷집밖으로 나가는 것에 실패한 세실리아를 제임스가 격려해주는 와중에 애니라는 여인이 도착한다. 애니는 제임스와 두어번 데이트를 한 사이로 혹시라도 세실리아와의 관계를 애니가 오해라도 할까봐 제임스가 서둘러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세실리아가 방에서 시드니의 의상에 대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는 장면. 일상적인 대화처럼 들리지만 다분히 대화 속에서 세실리아의 성격을 알 수 있는데, 가령 너무 튀지 않는 옷을 입는게 좋겠다라든가 제임스가 기다리니 좀 서두르자라는 등의 대사를 통해 다분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반면 시드니는 좀 더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으로 대조됨을 알 수 있다.
▷에드리안의 상속 건으로 인해 에드리안의 동생을 만나러 가는 세실리아 자매가 긴장을 푸는 의미에서 ‘터트리자. 비를 내리자, 바다로 흘려보내자’는 구호를 외치는 장면.
▷거액을 상속받은 세실리아가 모처럼 큰 맘먹고 쇼핑을 한 후 제임스와의 대화 장면. 세실리아가 방을 장식하기 위해 데이지를 사왔는데, 에드리안이 이 꽃에 알러지 반응이 있다는 말을 한다.
▷면접일 아침 핸드폰이 보이지 않아 가방을 다시 체크해 보는 세실리아. 가방안에는 분명히 면접에 쓰기 위해 챙겨둔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들어 있다.
▷세실리아가 걱정된 에밀리가 전화로 격려하는 장면. 세실리아는 죽은 남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게 아닌가 걱정된다는 말을 한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간간히 복도를 중심에 놓고 그 옆으로 방에서 세실리아가 통화하는 샷을 카메라가 잡아내는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이제 메이킹 필름에 해당하는 부가영상을 보자. ’Director's Journey with Leigh Whannell’은 리 워넬 감독이 직접 나와 40일간의 촬영 현장에서 직접 장면들을 소개하거나 영화 촬영에 대한 소감을 담은 일종의 영상일지다. 촬영 첫째날에 대한 소감에 대해서는 ‘[레이더스]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뛰어 가는 게 마치 한달 정도를 달려가는 것 같은데, 자신이 첫날 촬영을 해보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Moss Manifested’는 세실리아 역을 환상적으로 소화해 낸 엘리자베스 모스의 코멘터리가 담긴 영상이다. 일반적으로 투명인간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한 여성이 자신을 찾아가는 감성적인 드라마여서 맘에 들었다고 한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인 부엌에서 투명인간과 육탄전을 벌이는 신의 촬영 장면도 담겨 있다.
‘The Players’에서는 스텝과 배우들이 나와 각자 특정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돕는다. 그 중에서 애드리안 역을 맡은 올리버 잭슨 코헨에 대한 평가가 눈길을 끄는데, 영화의 극초반과 종반에만 잠깐 등장하지만 그런 복잡 미묘한 인물을 중간 과정이 생략된 채 연기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엘리자베스 모스는 올리버에 대해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린다.
독특한 투명인간 영화를 만들기 위해 리 워넬 감독이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는지 알고 싶다면 ‘Timeless Terror’를 보길 권한다. 영화에 접근하는 자세에서부터 각본을 쓸 때 주제나 메시지의 관점이 아니라 줄거리 중심으로 무엇이 나오는지를 관찰하는 등 리 워넬만의 독특한 작가적 시점을 확인할 수 있다.
스페셜 피쳐 목록
- Feature Commentary with writer/director Leigh Whannell
- Deleted Scenes(14:01)
- Moss Manifested (3:52)
- Director's Journey with Leigh Whannell(10:48)
– The Players(5:22)
- Timeless Terror(3:02)
총평
비록 다크 유니버스 계획은 좌초되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소재의 강점을 살린 개성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인비저블맨]은 전화위복의 사례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할로우맨] 처럼 화려한 특수효과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오로지 각본과 긴장감 넘치는 연출, 그리고 배우의 연기력만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으며, 투명인간을 다루는 면에서도 기존의 관습과는 완전히 다른 측면으로 접근한 점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코로나19로 극장가에서 이렇다 할 수작들을 찾기 어려운 시기에도 홀로 빛을 발한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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