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시절,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당시 학교 주변에는 문방구들이 많았다. 한국이란 사회가 늘 그렇듯이 피터지는 경쟁 앞에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사람은 백기를 들고 떠나야 했고, 그렇게 폐업을 선언한 한 허름한 문방구가 있었다. 해당 문방구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서 학생들이 등하교 때 들르기엔 조금 애매한 동선에 위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문방구 아저씨는 좀 특이한 식으로 폐업 세일을 했다. 당시 문방구들은 문고판 만화책들을 팔기도 했는데, 재고로 남은 만화책을 100원에 사가면 (이것도 그마나 1/10 가격이었다. 그 당시 문고판 만화의 기준이 1000원이었으니까) 남아있는 문구나 학용품을 서비스로 끼워주는 방식으로 재고처분을 했다. 그러니까 ‘만화책을 사면 서비스를 줍니다~’였던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 문방구의 특이한 폐업 세일 방식이 입소문을 탔고, 나 역시 평소에 들러 본 적 없던 그 문방구를 찾아가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많은 아이들이 문방구를 털어(?) 간지라 남아 있는 책들이 많이 없었다. 난 당시 현대코믹스에서 발행된 명랑만화 두 권을 집었고 2백원을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는 무심한 듯 돈을 받더니만 큼지막한 스노클링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헐…..
아마 그 사장님은 몰랐을 거다. 자신이 단돈 백원과 그 값어치 이상을 하는 재고품목까지 얹어서 줬던 그 만화책을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면 강남 집한채는 살 수 있는 자산가가 될 수 있었을 거란 사실을… 뭐 인생의 아이러니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옛날 만화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물론 이 분야에서도 일찌감치 물량을 헐값에 사 모은 장사꾼들이나 콜렉터들이 있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세계다.. 그들 중 일부는 돈에는 관심없이 순수하게 만화를 사랑해 수집하는 사람도 있지만 크게 한몫 잡으려고 혈안이 된 장사꾼들이 내가 알기론 더 많다.
그 중에 단연 인기는 태권브이 만화책이다. 표절이니 어쩌니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어쨌거나 태권브이는 한국 굴지의 히트작이자 최고의 인기 캐릭터(였)다. 그만한 상징성을 가졌으니 알게 모르게 추억을 가진 사람도 많다.
몇 년전에 게나소나(GnS)란 곳에서 김형배 화백의 [로보트 태권브이] 트릴로지를 복간한 적이 있다.
사실 고무적인 일인 건 분명한데, 아쉬움도 많은 판본이다. 이 게나소나 복간본의 가장 큰 문제는 [태권브이 대 황금날개] 편의 엔딩 부분이다.
조금 자세히 말하자면, [태권브이 대 황금날개]는 연재는 월간 <새소년>에서, 단행본은 클로버문고에서 발행했던 작품이다. 문제는 이 당시부터 엔딩에 약간 스텝이 꼬였다는 것. 원래 [태권브이 대 황금날개]는 <새소년>의 별책으로 제공되는 작품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지막 14페이지 분량은 책 속의 부록으로 연재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클로버문고 [태권브이 대 황금날개] 단행본의 경우에도 엔딩이 온전히 수록되지 않은 채 그냥 2권으로 마무리 되었다. 아마 당시 단행본의 페이지를 초과해서 나머지 분량을 수록하는게 애매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
그 이후 백조문고와 GnS를 거치며 재판이 이루어 졌지만 오리지널 엔딩은 수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GnS 판본은 자기들이 만화의 다른 컷에서 따온 장면들을 임의적으로 편집해 급조한 엔딩을 끼워 넣고 말았다.
이번 1976 한정판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그 점이다. 사실상, 본질적으로 이번 리프린팅은 게나소나의 판본에서 전혀 발전된 것이 없다. 뭉게진 선 -실제 초판본을 보면 펜선의 섬세함이나 입체감이 게나소나 판본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나 거친 디지털라이징의 흔적도 개선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판형만 키운 재탕인 셈이다.
이젠 세월이 흘러 자료가 충분히 수급 가능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태권브이 대 황금날개]의 엔딩은 예전 GnS의 급조된 가짜 엔딩을 똑같이 수록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아 휴민트를 가동해 본 결과…. 굳이 여기서 쓰진 않겠다만 이번 리프린팅에 마나문고측이 어떤 마인드를 갖고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충격적인 얘기도 듣게 되었다.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를 흉내내려고 한 것인지 이슈북 판형을 따라해서 책을 잘게 분철해 놓았다. 마나이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사항. 패키지의 구성물 자체는 뭔가 푸짐한데, 막상 본편이 주는 매력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속표지는 흑백의 원래 표지로 프린팅하고 겉표지는 김형배 화백이 새로 그린 표지로 디자인했다. 이 또한 호불호가 명확히 갈릴 지점인데,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김형배 화백은 거의 수십년 동안이나 태권브이에서 손을 뗀 것과 다름 없다가 이번에 다시 작업을 한 것이다. 당연히 화풍도 달라져 있고 이질감이 드는 건 명백하다. 예전의 그림이 칼같이 제도한 듯한 만화의 느낌을 주었다면 최근의 그림은 일종의 수채화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이번 마나문고의 김형배 태권브이 콜렉션은 대박을 쳤다. 아마 그간 전설의 태권브이 만화를 소문으로만 들었고나 한 권쯤 소장하고픈 사람들의 심리를 제대로 건드린 것인지 펀딩액만 거의 1억원에 가까운 수준. 그걸로는 성에 안 찼는지 앵콜 펀딩 명목으로 개별 패키지까지 제작해 재탕의 재탕을 했으니 제작사 측으로서는 꽤 쏠쏠한 돈벌이가 되었을 거다.
그런데… 다음에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김형배 태권브이 콜렉션은 서막에 불과했으니….
- 2부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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