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페니웨이 (admin@pennyway.net)
관람이 아닌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
벌써 20년이나 흐른 이야기이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존의 전쟁 영화가 드라마나 인물에 초점을 맞추며 정작 전쟁 그 자체의 참혹함을 언급함에 있어 금기시 했던 것과는 달리 스티븐 스필버그는 과감하게 선을 넘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의 처참함,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이 사지를 뚫고 신체를 훼손하는 참혹한 비주얼을 여과없이 보여주던 이 영화를 보며 비로서 전장의 무시무시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영화계는 유사 리얼리즘의 흐름을 쫓아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 더는 주저하지 않았고, 근래의 [퓨리]나 [헥소 고지]에 이르기까지 그런 사실적인 전쟁 장면의 연출을 보노라면 –영화의 재미를 떠나- 이젠 나도 모르게 식상하다고 느껴지는 걸 의식하면서 사람의 적응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곤 한다.
ⓒ 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지금껏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 영화가 2차 세계대전을 무대로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약간의 우려가 앞섰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게다가 소재는 전생사에서도 꽤나 유명한 ‘다이나모 작전’이라니, 이건 안봐도 국뽕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그러나 그건 범인에 불과한 필자의 기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놀란 감독은 늘 실험적인 시도를 해 온 연출가다. [메멘토]에서는 시간의 역순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편집 기법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다크 나이트]는 슈퍼히어로물에 범죄 스릴러를 접목시켜 ‘아트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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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 꿈의 공간과 현실 세계를 미로처럼 엮어 버린 [인셉션]이나 5차원의 개념을 2차원의 시각적 현상으로 풀어낸 [인터스텔라] 모두 평범함을 거부하는 실험적 시도가 돋보였던 영화다. 그의 영화는 대중의 입맛을 잘 맞추고 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실험을 착실하게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덩케르크]의 소재가 결말이 노출된 전쟁사의 한 부분이라고 한들, 평범한 전쟁영화로 그칠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게 더 자연스럽다는 얘기다.
실제로 [덩케르크]는 지금까지 봐 온 전쟁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다이나모 작전 실행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짤막한 자막과 함께 낙오된 영국군 병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생소한 얼굴의 이 배우가 주인공인가 싶을 무렵, 영화는 무대를 바꾸며 다이나모 작전에 참여한 민간인 선박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세 번째 이야기는 덩케르크 해안을 향해 날아가는 영국공군 조종사의 이야기다. 영화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화면 비율과 함께 각기 다른 시간 대에서 출발한 세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다중 플롯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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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할 만한 점은 세 편의 이야기에 주어진 각각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1일과 1주일 그리고 1시간 동안 일어난 각각의 사건들은 매우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어서 교차 편집의 단점인 산만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보이질 않는다. 세 사건이 하나의 이야기에서 만나는 그 순간까지 관객들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영화에 몰입해 들어간다. [메멘토]에서 보여준 편집의 미학이 드디어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다.
[덩케르크]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듯 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튀는 전장의 참혹함을 배제해 버린다. 너무 많은 CG와 가상의 공간으로 가득 찬 시대에 놀랄만큼 우직하게 아날로그적인 기법으로 촬영한 영화이지만 건조한 감정선과 상황 연출, 그리고 한스 짐머의 영혼이 담긴 불협화음이 빚어낸 음향만으로도 [덩케르크]가 주는 현장감은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도 사실적이다. 흔히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는 결말의 부동성 때문에 서스펜스가 힘을 잃는 경우가 많지만 [덩케르크]의 서스펜스는 어지간한 스릴러 영화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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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떤 이는 [덩케르크]의 서사가 빈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딱히 이 점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특정 캐릭터에 대한 프롤로그나 치밀하고 복잡하게 쓰여진 서사 따윈 없다. 말하자면 전쟁의 상황, 분위기 자체가 영화의 서사이자 내러티브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많은 감정들과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때론 공포스럽고 때론 비극적이며, 때론 희망과 감동을 주는 다양한 반응들을 이끌어 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덩케르크]에 대한 반응은 호불호가 갈릴 터인데,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줄거리와 캐릭터의 구축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덩케르크]를 비난할지 모른다. 이는 곧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지루하다거나 재미가 없다는 반응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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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덩케르크]의 낯선 스토리텔링에 반했다면 ‘역시나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탄성을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덩케르크]가 자신에게 맡는 지의 여부는 제 3자의 말을 통해 듣는 것 보단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굳이 필자의 사견을 물으신다면, 글쎄… 개인적으로는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넘어선 작품’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단순한 관람이 아닌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라고나 할까.
블루레이 퀄리티
4K UHD로 넘어가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아직까지는 블루레이로도 버틸만 하다는 걸 보여주는 타이틀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온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최고의 화질을 자랑하고 있다. 아니, 다시 정정하겠다. 2017년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 중에서도 최고의 화질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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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는 106분의 러닝 타임 중 100분 가량이 아이맥스 MSM 9802 카메라로, 나머지는 파나비전 65mm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본 타이틀에서는 1.78:1 (아이맥스)에서 2.20:1(파나비전 65mm)의 화면비 전환으로 극장에서 느꼈던 감동을 어렴풋이 맛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아이맥스의 그 무시무시한 화면 장악력을 가정에서 재현할 수 없음이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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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놀란의 기존 작품들에서 아이맥스 촬영분과 일반 장면의 촬영분이 화질 편차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덩케르크] 블루레이에서는 포맷에 관계 없이 놀라운 홈 시어터의 화질을 경험하게 한다. (물론 이는 이전작인 [인터스텔라]와는 달리 35mm필름이 아닌 65mm필름을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4K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디테일한 화면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풀 HD급 블루레이 영상에서는 가히 ‘레퍼런스’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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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감독 하에 블루레이 트랜스퍼 소스의 색보정이 수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두운 장면에서의 암부 표현력도 무척이나 뛰어나다. 일례로 가라않는 배 안에 갇힌 젊은 병사들이 흑암의 바다로 탈출하는 장면에서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덩케르크]가 추구하는 화면이 컬러풀하고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적막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의도된 미세한 색상의 스펙트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뛰어난 색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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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도 중요하지만 [덩케르크]에서 더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사운드다. 이 작품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화면에서가 아니라 BGM과 효과음으로 빚어내는 긴장감의 고조가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스 짐머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기이하고도 기분나쁜 음향이 최고조에 이를 때면 관객들의 심박수도 덩달아 급상승하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운드로 빚어내는 긴장감의 연출 방식dl 드니 뵐뇌브 감독의 전매특허라고만 생각했다가 그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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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나타나는 독일군 폭격기가 해변을 공습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한 편의 공포 영화보다도 더 심장 쫄깃한 경험을 선사한다. 의외로 DTS-X나 돌비 애트모스가 아닌 DTS-HD 5.1의 비교적 평범한(?) 사운드 포맷을 채택했음에도 기관총의 총성부터 비행기의 강렬한 엔진음, 출렁이는 파도와 군화로 밟고 지나가는 모래사장의 발자국 소리에 이르기까지 [덩케르크]의 사운드를 감상하는데 별로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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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피처
[덩케르트] 블루레이는 스페셜 피처가 수록된 별도의 디스크를 제공하고 있다. Creation, Land, Air, Sea, Conclusion 등 총 5개의 메인 주제로 나뉘어져 16개의 작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Creation”은 메인 메이킹 필름이라 볼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을 비롯한 영화의 스텝 및 배우들이 출연해 다이나모 작전의 실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흥미로운 점은 놀란 감독이 자신의 부인이자 제작자인 엠마 토머스와 함께 작은 요트로 영국 해협을 가로질러 덩케르크로 가는 여행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추위와 궂은 날씨 때문에 무척 고된 경험이었다고 하는데, 이 일을 통해 일반 시민들이 작은 배를 타고서 목적지가 전쟁터인 험난한 바다를 건넌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를 계기로 [덩케르트]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된 듯 하다. 이 부가영상에는 영화를 위해 놀란이 직접 덩케르크 철수를 경험했던 생존자들과 인터뷰 하는 장면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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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는 영화의 물리적 세트 중 하나인 육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재현해 냈는지를 알려준다.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잔교’를 비롯해, 육지 파트에서 출연한 배우들을 신인으로 구성한 이유, 군복의 디자인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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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는 공중 촬영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사람들은 GoPro 같은 장비 덕문에 극단적인 물리적 경험을 흥미로운 주관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영화 제작의 기준이 높아졌음을 놀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때문에 1940년대의 비행기를 현대의 관객이 반응하고 이해할만한 방법으로 나타내기 위해 어떤 방식을 사용했는지 확인시켜 준다. 특히 놀란은 CG를 최소화하고 가급적 아날로그적인 기법을 사용하기로 유명한데, 본 작품에서 최대한 2차세계대전 당시 사용했던 실제 비행기를 공수해 사용하는 방향으로 별도의 항공팀을 꾸려 영화를 찍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사실적인 연출에 집착하였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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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는 바다 장면에서 사용된 구축함을 어디서 구했는 지부터 알려준다. 전쟁 당시에 사용되었던 영국 구축함은 남아 있지 않아서 최대한 닮은 모양의 프랑스 구축함을 찾아냈는데, 낭트에서 박물관으로 쓰던 ‘말리 브레제’를 공수해 영국 구축함처럼 개조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대신 실제 운항이 불가능했던 관계로 배를 띄운 채로 화면에 담기는 시야 밖에 예인선을 대고 배를 이리 저리 끌고 다녔다고. 배를 들여오기 위해 여러가지 복잡한 서류 절차를 걸쳐야 함에도 작품 전체의 고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CG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놀란의 옹고집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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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Conclusion”에서는 영화의 긴장감을 살리기 위해 시계의 초침 소리를 사용한 것이나 음을 착각하게 만드는 기법인 ‘셰퍼드 음’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이 기법은 과거 놀란의 작품인 [프레스티지]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여러가지 음악적 기술에 대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꼭 감상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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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잔인한 장면이 단 한 컷도 나오지 않으면서 이 정도의 서스펜스를 2시간 내내 유지한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다. 서두에 언급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이례적인 비주얼로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노출하는 충격 요법을 쓴 전쟁영화라면 [덩케르크]는 보수적인 스타일로 전쟁을 표현하되 체험의 현실감을 극대화시키는 놀라운 표현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비록 모든 이들을 100%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독창적이면서도 과감한 실험울 진행 중인 놀란의 시도는 여전히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덩케르크] 블루레이는 화질과 음질, 그리고 서플먼트 등 모든 면에서 2017년을 마감하는 최고의 블루레이로서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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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덩케르크: 초도한정 오링케이스 (2disc)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톰 하디 외 출연/워너브라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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