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이제 그는 자신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관객들에게 신뢰심을 심어주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얼마전 [다크 나이트]의 재개봉판을 감상했는데, 명작은 언제봐도 명작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의미로는 제임스 카메론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영화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내놓은 작품은 [덩케르크]입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실제 있었던 덩케르크 탈출 작전을 소재로 한 이번 영화는 외견상으로는 분명 전쟁영화의 틀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개봉 직전까지도 놀란은 [덩케르크]의 장르를 명확히 규정짓지 않았지요. 게다가 최근 전쟁영화의 트랜드와는 맞지 않게 PG-13 등급을 받았으니 더욱 의아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미스터리한 영화, [덩케르크]는 그렇게 관객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습니다.
[덩케르크]의 개봉 초반의 국내 관객평은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엉터리 전쟁영화라는 평에서부터 얄팍하다는 혹평도 보이며, 역시 놀란은 영화의 신이라는 극찬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다양합니다. 전 그 점 하나는 인정하고 싶습니다. [덩케르크]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기존의 영화 공식을 완전히 깨버린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라는 걸요.
일단 이 작품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영화적 구성을 완전히 벗어난 작품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위기-절정-위기-절정-결말로 끝나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의 한 가운데에 놓여져 일단 살고 봐야 하는 상황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짤막한 몇마디의 자막이 주어진 실마리의 전부이지요.
ⓒ 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여기에 크게 세 팀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낙오된 영국군 토미의 이야기와 영국군의 부름을 받은 민간인 도슨 부자, 그리고 영국공군 파일럿 파리어의 이야기이지요. 각각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이라는 묘한 자막이 주어지는데, 이는 [메멘토]에서 보여주었던 독특한 교차 편집의 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프롤로그나 복잡한 서사 따윈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냥 상황 자체가 영화의 내러티브인 셈입니다.
이렇듯 발단과 전개가 생략된 채 위기로 직행하는 이 작품에서 관객들은 한 치도 숨돌릴 틈을 얻지 못합니다. 전쟁 특유의 잔인한 장면이 단 한 컷도 나오지 않으면서 이만한 서스펜스를 2시간 내내 유지한다는 건 엄청난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만한 긴장감의 50%는 특유의 불협화음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한스 짐머의 솜씨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이례적인 비주얼로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노출하는 충격요법을 쓴 전쟁영화라면 [덩케르크]는 보수적인 스타일로 전쟁을 표현하되 체험의 현실감을 극대화시키는 놀라운 표현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이 전쟁영화가 아니라 스릴러라고 규정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봅니다. 그만큼 영화의 흡입력과 서스펜스는 가히 미쳤다고 할만한 수준이니까요.
그러나 전통적인 서사방식을 과감하게 버린 [덩케르크]의 내러티브는 적지않은 거부감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어떤 관객들에게는 영화에 이야기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이는 곧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지루하다거나 재미가 없다는 반응으로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반응을 비웃으려는 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모두를 만족시키기엔 조금 부족합니다.
개인적인 소감을 묻는다면 전 역시나 놀란의 팬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전작인 [인터스텔라]에서도 느꼈지만 놀란은 지금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매우 독창적이고 과감한 실험을 진행중이며, 그 결과 매우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제 놀란에게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맡겨도 그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낼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P.S
1.아이맥스 필수입니다. 놀란이 3D 따위는 취급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아이맥스가 어렵다면 사운드라도 빵빵한 관에서 즐기십시오. 일반관과 체감차이가 최소 두 배는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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