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렸을 적, 처음 레고를 접했을 때 이건 무슨 쓰잘대기없는 플라스틱 쪼가리들인가 생각했었다. 즐겨 갖고 놀던 장난감들에 비하면 모양도 보잘 것 없었고, 조립식 프라모델처럼 설명서를 보면서 지시에 맞게 뭔가를 제대로 끼워 맞춰 나간다는 성취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동안 레고를 갖고 놀아보니 이건 기존 장난감과는 전혀 다른 신세계가 열리는 게 아닌가! ‘레고 심슨’과 같이 특정한 라이센스 키트의 경우는 예외겠지만 기본적으로 레고는 매뉴얼이 필요치 않은, 창의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난감이었던 것이다.
레고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모양으로 주어지는 블록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오만가지 형태로 바뀐다. 사용자는 레고를 가지고 말 그대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자동차나 배, 비행선에서 집이나 궁전, 고층빌딩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물체들을 뚝딱하고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레고의 매력이다. 블록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레고의 기능이 상실되는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레고는 쉽게 파손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특별함 때문에 레고는 1930년대부터 줄곧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해 왔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들에서 손자로 넘어오는 세대의 변화 속에서도 레고의 매력은 결코 소멸되거나 희석되지 않았다. 오히려 레고의 인기는 현대문명의 총아인 영상매체와 만나 한층 더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미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레고 닌자고] 시리즈를 비롯해 다양한 블록버스터 영화와 콜라보레이션을 보여준 여러 가지 단편 애드무비에 이어 본격적인 장편 애니메이션을 시도한 [레고: 클러치 파워의 모험]이나 [레고: 배트맨 더 무비]를 통해 상업 영화로의 진출을 모색한 바 있다.
ⓒ Warner Bros., Village Roadshow Pictures, RatPac-Dun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레고 무비]는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을 통해 레고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제작진의 야심이 담긴 궁극의 완성품이다. 사실 기존의 레고 영상물이 지닌 가장 큰 거부감 중 하나는 레고의 형태를 가진 주인공들이나 사물이 CG로 도배된 애니메이션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엄밀히 말해 레고의 가장 큰 특징은 우직할 정도로 변함없는 아날로그적 형태와 질감에 있는데도 움직임이나 형태, 그리고 표현 양식에 있어 기존의 작품들이 지나칠 정도로 기성 애니메이션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은 레고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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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레고 무비]의 제작진은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한 듯 하다. [레고 무비]에서 등장하는 레고 피겨들은 '진짜 레고'처럼 정교하다. 벗겨진 코팅이나 크고 작은 생채기들, 주조틀의 이음새까지 표현하는 캐릭터의 외형은 정말이지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사실적이다. 게다가 이들의 움직임 또한 뚝뚝 끊어지는 스톱모션의 느낌을 그대로 담아냈다. 마치 어린아이가 실제 레고를 가지고 노는 듯한 바로 그 느낌이랄까. 의도적으로 화려한 CG를 입히지 않고, 물이나 번개, 폭발 등을 레고 블록의 원형 그대로 재현한 점도 매우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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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무비]의 장점은 이러한 기술적인 부면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스토리적인 측면에서도 꽤나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일단 스토리를 잠시 살펴보면 이렇다.
레고의 지배자 로드 비즈니스는 '마스터 빌더'인 비트루비우스에게서 치명적인 무기, 크레이글(※주:실은 '크레이지 글루'를 뜻하는 것으로 일종의 접착제)을 빼앗아 레고 세계에 살포하려 한다. 로드 비즈니스에 의해 눈이 먼 비트루비우스는 조만간 '전설의 피스'를 손에 넣은 마스터 빌더가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지만 로드 비즈니스는 이를 무시하고 계획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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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고 무비]가 흥미로운 점은 여러 영화들의 무차별 패러디 공세 속에서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 작품에서 비트루비우스의 목소리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삼부작에서 루시우스 역을 맡은 모건 프리먼이며, 주인공들을 끝까지 뒤쫒는 배드캅은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듀카드 역으로 출연한 리암 니슨의 목소리다. 여기에 조연 캐릭터로 레고 배트맨까지 등장하니, 이건 누가봐도 의도된 캐스팅이 아닌가.
한편 공사장 인부로 살아가는 에밋은 모든 일을 매뉴얼대로만 하려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어느날 그는 미모의 여성 와일드 스타일을 발견하고 한 눈에 반하는데, 그만 작은 사고로 등짝에 '전설의 피스'가 들러붙게 된다. 와일드 스타일은 에밋이 전설의 '스페셜' 마스터 빌더라고 생각해 그를 비트루비우스에게 데려가지만 아무런 개성도, 뛰어난 창의력도 없는 에밋은 세계를 구원할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레고 세계의 모든 마스터 빌더가 잡혀가고 에밋의 혼신을 다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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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고 무비]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마스터 빌더'다. 이 용어는 레고사에서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공식 레고 세트를 디자인하는 고도로 숙련된 레고 조립가들을 지칭한다. 이 작품에서는 비트루비우스를 비롯해, 배트맨, 슈퍼맨, 와일드 스타일, 간달프 등 모든 라이센스 캐릭터들이 마스터 빌더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레고 무비]는 창의력을 이용해 모든 사물을 조립할 수 있는 마스터 빌더와 모든 것을 의도한 위치대로 정확히 고정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로드 비즈니스의 대립, 여기에 매뉴얼 없이는 엉뚱한 물건이나 만들어 내는 에밋이 끼어들면서 벌어지게 되는 이야기다. 기본적으로는 [매트릭스]의 '구원자' 내러티브를 모티브로 삼고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고를 즐기는 방식에 대한 논의를 영리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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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이면서 식상한 소재를 가지고도 클래식한 레고의 특장점을 잘 살려내었고 게다가 영화의 재미와는 별개로 이 한 편의 작품이 온전히 레고를 위한 장편 광고라는 점에서 볼 때 [레고 무비] 제작진의 저력이 새삼 두려울 정도다. 아마도 아이들과 이 영화를 보는 순간 당신의 주머니는 이미 털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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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은 작은 피스들이 모여 형태를 구성하는 레고의 특성이 반영되어 오브젝트가 유난히 많은 영상이 특징이기도 한데, 그만큼 피사체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담아낸 영상이 돋보이는 타이틀이라 하겠다. 전반적인 색조는 밝고 화사하며, 원색은 선명하고, 암부 계조는 뭉개짐없이 깊고 표현력이 뛰어나다. 콘트라스트는 조금 강한 편인데, 덕분에 알록달록한 레고 본연의 색상이 부각되어 적당한 균형감을 유지한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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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S-HD 5.1 규격의 사운드 역시 만족스럽다. 저음 영역대는 폭발과 충돌이 발생하는 매 순간마다 쉴새없이 울려대며 묵직한 사운드를 선사한다. 레고 블록이 조립되는 찰나의 찰칵거림과 같은 미세한 효과음도 탁월하게 표현되며 대사 전달력도 뛰어나다. 또하나의 반가운 소식은 지난번 [레고 배트맨: 더 무비]와는 달리 한국어 더빙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인데, 본 작품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원어 감상이 필수적이긴 하지만 아이가 있는 집을 위한 특별한 보너스라고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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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러닝타임으로 보면 그리 길진 않지만 자잘한 서플먼트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눈여겨 볼만한 몇 가지를 추려보면 먼저 'Michelangelo and Lincoln'이 있는데, [레고 무비]에서 까메오로 등장하는 링컨과 미켈란젤로가 각각 CIA 최고의 범죄 폐지론자와 로마 경찰의 터프한 형사로서 듀오를 이루는 버디 무비의 가짜 예고편이다. [그라인드 하우스]에서 [마셰티]의 가짜 예고편을 삽입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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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ging Lego To Life'는 [레고 무비]의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으로서 제작진은 물론이거니와 흥미롭게도 레고 캐릭터인 에밋 또한 실제 배우처럼 인터뷰에 참여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영상의 중반부에 들어서면 레고의 고향 덴마크의 본사 탐방이 이어지는데, 아마 레고의 팬이라면 이곳이야말로 ‘디즈니랜드’급의 성지처럼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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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It, Build It!'은 레고의 제작 방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영상 매뉴얼로서 마스터 빌더인 마이클 퓰러가 직접 영화 속에 등장했던 여러가지 레고 모형들을 조립하는 방법을 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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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Made Films: Top-Secret Submissions”은 레고의 공식 미디어 플랫폼인 르브릭스에 소개된 몇몇 팬메이드 필름의 짧은 클립들을 수록해 놓았다. 다양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레고의 무한 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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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ted Scenes”은 삭제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영화의 초기 버전에서 에밋의 동료들은 쿠쿠 랜드의 파멸을 에밋의 탓으로 돌리는데, 그 벌로 에밋이 해적 선장의 배에 있는 감방에 갇히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실제 영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스토리 보드 상의 내용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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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부율협상 문제와 [겨울왕국] 돌풍에 밀려 흥행에 실패했지만 북미시장에서는 3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라 일찌감치 속편 제작을 서두르고 있을만큼 고무적인 결과를 낸 작품임을 잊지말자. 장르물의 다양한 공식들을 전복시키며 제 멋대로 훈훈한 결말을 내리는 [레고 무비]의 성격은 자유자재로 변형 가능한 레고의 성격과도 일치하며 이는 근래에 나온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가장 유니크한 작품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이 단순히 레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레고를 다루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마지막 10여분의 반전과 엔딩의 쾌감은 레고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 있는 관객에게 있어 [토이 스토리 3]의 강렬함과 맞먹을 것이다. 단언컨데 [레고 무비]는 아이와 아빠 모두를 만족시켜 줄 궁극의 키덜트 무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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