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맨 오브 스틸]이 개봉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 리턴즈]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싱어는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했고 [슈퍼맨] 프랜차이즈가 가진 한계내에서 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싱어가 좋아했던게 [슈퍼맨] 그 자체가 아니라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이란 점이었죠. [슈퍼맨 2]의 씨퀄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기특할 정도로 잘 만들어졌지만 정작 80년대 [슈퍼맨]의 후속편을 원한 관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게 함정이었달까요.
가뜩이나 액션연출에 취약한 싱어는 리처드 도너 스타일의 드라마를 선택했고 그 결과 영화는 80년대의 클래식한 느낌을 가진 21세기 슈퍼맨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미지근한 성적을 거둔 북미성적에도 불구하고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의 분전 덕분에 꽤 많은 수익을 거뒀지만 사람들의 뇌리에는 ‘실패한 슈퍼맨’이라는 낙인효과가 생기게 되었죠. 그래도 이 당시에는 [맨 오브 스틸]을 [슈퍼맨 리턴즈]의 후속작으로 놔둘 것인지 아니면 리부트를 할 것인지에 대해 제작진들 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겁니다.
ⓒ DC Comics, Warner Bros. All rights reserved.
사실 워너 중역들도 싱어의 후속작 연출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고 (물론 전작에서 지나치게 많은 제작비를 소모한 것을 감안해 예산 감축에 대한 의사는 밝힌 바 있죠. 그 많은 제작비의 탕진도 싱어 개인의 실책은 아니었습니다만...) 싱어 역시 [슈퍼맨 리턴즈]에서 지적되었던 빈약한 액션과 강력한 빌런의 등장 부분에 대해 공감하고 이를 반영하겠다는 생각을 타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워너의 또다른 슈퍼히어로 프로젝트인 [다크 나이트]의 대성공 이후에 발생합니다.
워너측은 슈퍼히어로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문제, 그리고 진지하고 어두운 영웅상이 시대의 트렌트가 되었다는 확신을 굳혔지요. 비록 [슈퍼맨]이 [배트맨]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은 시리즈이지만 [다크 나이트]의 성공에 고무되어 다크한 버전으로 리부트를 하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불안감이 앞섰습니다. 그리고는 급기야 [다크 나이트]의 크리스토퍼 놀란을 제작진에 끼우고 [왓치맨]의 잭 스나이더를 감독으로 선임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더라도 굉장히 묘한 조합이죠. 이건 '스토리의 놀란과 비주얼의 스나이더'식의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잭 스나이더에게도 [맨 오브 스틸]은 많은 부담으로 다가왔을 작품입니다. 아무리 3,4편의 흑역사로 인해 망가진 시리즈라지만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은 이 바닥에서 전설과도 같은 존재인데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합류는 '잘되면 놀란의 덕, 실패하면 스나이더의 탓'으로 갈 공산이 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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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른 작품들에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만 리부트는 따지고 보면 그리 손쉬운 선택은 아닙니다. 모든 작품이 [배트맨 비긴즈]나 [007 카지노 로얄]처럼 성공할 순 없는 법이니 말이죠. 무엇보다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의 재탕에 '왜 내가 이 이야기를 또 들어야 하나' 하며 식상해할 확률이 더 큽니다. [맨 오브 스틸]도 이러한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고향별인 클립톤의 파괴와 조-엘과 칼-엘의 이별, 그리고 켄트 부부에게 입양되어 지구인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은 [슈퍼맨]의 팬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고 특히 리처드 도너는 이러한 도입부의 구성을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 낸 전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죠.
각본을 직접 집필한 놀란과 데이빗 S. 고이어는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듯,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의 자아 정립과 인간 아버지인 조나단 켄트와의 관계에 특별한 주의를 이끕니다. 플래시백을 적절히 활용한 이 설정은 작품의 중반까지 꽤나 잘 먹혀들어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배트맨 비긴즈]에서 아버지를 잃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브루스 웨인의 이야기와도 오버랩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설정은 놀란표 슈퍼히어로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복선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슈퍼맨은 슈퍼맨이고 배트맨은 배트맨일 뿐입니다. 이 둘은 태생부터 다르죠. 배트맨은 어렸을적 부모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가졌을 뿐더러 그 스스로가 자경단의 길을 선택한 ‘어둠의 기사’입니다. 이야기가 다크할 수 밖엔 없습니다. 반면 슈퍼맨은 선의 결정체입니다. 유사 메시아적 성향을 가진 구원자로서 그의 이미지는 희망적이고 온화한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죠. 그런 면에 있어서 리처드 도너나 브라이언 싱어는 캐릭터의 본질을 아주 잘 짚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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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맨 오브 스틸]의 슈퍼맨 역시 캐릭터 구축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고 방향성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반 이후로 모종의 괴리감을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친아버지 조-엘과의 조우를 겪는 시점 이후로 칼-엘이 갈등 요소들을 극복하고 슈퍼맨으로서 아이덴티티를 찾는 부분에서의 감정이입이 떨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후반부의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액션에도 영향을 미쳐서 역대 슈퍼맨 영화 중 가장 파괴적인 영상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마치 데미지 없는 게임 캐릭터들의 대전게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지요. (이 또한 슈퍼맨급의 괴물들이 벌이는 싸움의 리얼리즘이라고 해석한다면 할말은 없습니다만...)
한편 헨리 카빌을 비롯한 배우들의 캐스팅은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크리스토퍼 리브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낸 헨리 카빌의 연기가 좋구요, 짧지만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줬던 케빈 코스트너나 (말론 브란도의 존재감엔 못미치지만) '글레디에이터'스런 러셀 크로우의 조-엘도 나쁘지 않습니다.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조드 장군역의 마이클 섀넌입니다. 물론 섀넌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건 사실이지만 메인 빌런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피오나역의 안체 트라우쪽이 훨씬 더 무게감 있으며 한편으론 그녀를 메인 빌런으로 삼는 파격성을 추구했더라면 하는 망상도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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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다소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지만 [맨 오브 스틸]에서 단점만 보이는 건 아닙니다. 조드 장군의 캐릭터를 스테레오 타입의 악당이 아니라 태생적인 군인으로 운명지어져 그의 모든 행위가 '애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해석은 무척 신선하게 와 닿구요, 데일리 플래닛의 로이스 레인을 종군기자로 설정하고 클락 켄트의 정체를 일찌감치 알고 있는 것으로 바꾼 점도 나름 괜찮은 시도였습니다. (요즘 대세는 히어로의 정체 폭로인가효...)
어쩌면 [맨 오브 스틸]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배트맨 비긴즈]의 진가가 [다크 나이트]로 인해 확연히 드러났듯이 [맨 오브 스틸]은 가이드를 제시한 놀란의 다음 계획에서 그 진가를 드러낼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까요. 새로운 슈퍼맨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P.S
1. 존 윌리엄스의 스코어가 빠진 [슈퍼맨]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나 낯설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음악은 이제 [슈퍼맨]의 심볼이 되어버렸습니다.
2.,[저스티스 리그]를 위한 떡밥이 적어도 5개는 나오더군요. 인공위성에서의 웨인 엔터프라이즈 문장, 조드가 던진 탱크로리에 LexCorp. 상표와 메트로폴리스의 시가전에서 LexCorp. 빌딩 등장. 그리고 칼-엘이 조-엘과 조우하는 우주선은 '슈퍼걸' 카라-엘이 타고온 우주선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캡슐 하나가 뚜껑이 열린 상태죠. 마지막으로 BLAZE Comics라는 간판도 등장하는데 이는 DC코믹스의 히어로 부스터골드가 출연하는 코믹스의 브랜드입니다.
3.역대 조드 장군 중 가장 카리스마 넘쳤던 테렌스 스템프의 까메오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조드 앞에 무릎을 꿇어라!"의 후덜덜한 포스란..), 이번 작품은 너무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을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맨이 테라포밍하는 월드머신에서 도약할 때 헨리 카빌의 모습이 잠시나마 크리스토퍼 리브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이는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리브의 얼굴을 CG 합성한 결과물입니다. 역시나 고인이 된 리브는 영원한 슈퍼맨입니다. ㅠㅠ
4.영원한 '모피어스' 로렌스 피쉬번은 거의 비중이 없어서 급실망. 이젠 그저 그런 뚱땡이 흑인배우인 건가. OTL
5.차기작에서 메인 빌런은 제발 렉스 루터가 아니길 바랍니다. 지능형 빌런이라는 점에서는 조커와 일맥상통합니다만 이젠 적어도 둠스데이 정도는 나올때가 되지 않았나요. 실제로 모성인 클립톤을 묘사할때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생김새가 모름지기 둠스데이를 연상케합니다.
6.안체 트라우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팬도럼]에서 여전사 캐릭터로 나왔던 그 배우더군요. 확실히 그 이후 눈에 띄는 작품이 없었는데 이번 피오나 역으로 인해 인지도가 급상승할것 같은... 눈빛이나 표정연기만 볼 때 [맨 오브 스틸]의 베스트였다고나..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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