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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크로스오버의 세계

페니웨이™ 2012. 5. 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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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와 마징가제트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필자가 어렸을 때 꼬꼬마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이런 질문은 아마도 서로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한 작품에서 보길 원하는 원초적 욕구의 충족을 드러내는 가장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국적도 원작자도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이 어찌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죠.

물론 저작권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에는 간혹 이런 상상속의 일이 실현되곤 했습니다. 일례로 영국의 대표적인 명탐정 셜록 홈즈와 프랑스를 대표하는 괴도 뤼팽이 한 작품에 등장해 불꽃튀는 대결을 펼치는, 가히 추리소설 마니아들에게 있어서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맞대결이 실현된 적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뤼팽과 홈즈의 대결>, <기암성>, <813의 비밀>에서 세차례나 흥미진진한 자존심 대결을 펼칩니다. 헌데, 이 작품들은 사실 뤼팽의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이 코넌 도일의 허락없이 자기 멋대로 홈즈를 끌어다 쓴 것이었습니다. 결국 코넌 도일의 항의로 르블랑은 작품 속 셜록 홈즈의 이름에서 S와 H의 순서를 바꿔 헐록 숌즈라는 짝퉁스런 이름으로 바꿔야만 했지요.

의 프랑스판 표지. 원래 셜록 홈즈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작품이지만 원작자의 항의를 받아 헐록 숌즈로 이름을 바꿨다.' height=500>

흔히들 이렇게 다른 작품 속 주인공이 한 작품에서 만나는 것을 두고 ‘크로스오버’라고 합니다. 방금 언급한 르블랑의 경우처럼 타인의 작품 속 주인공을 무단으로 끌어쓰는 사례를 제외하면 대중문화에서의 크로스오버는 굉장히 까다로운 일입니다. 일단 한 작가가 여러 작품과 다양한 주인공을 만들어야 하고, 이들 주인공은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해야 하며, 각 작품들에 대한 판권관계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얼마전부터 전세계적인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어벤져스]는 그런 의미에서 기념비적인 크로스오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언맨, 헐크, 토르,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호크아이 등 웬만한 영화 한편의 주연급으로 등장할법한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 작품은 슈퍼히어로물을 즐겨보는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프로젝트인 셈이죠. 이렇게 상상속의 크로스오버가 실제로 실현될 수 있었던 건 저작권을 가진 마블사가 영화화 판권을 차곡차곡 회수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벤져스] ⓒ ⓒ Marvel Enterprises, Marvel Studios . All rights reserved.

물론 엄밀히 말해 [어벤져스]는 완벽한 크로스오버는 아닙니다. 아마도 코믹스의 팬들이라면 [어벤져스]에서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의 주인공들이 빠져있는 것에 조금 불만을 가질지도 모를텐데요, 이는 [스파이더맨]의 경우 소니픽쳐스측이, [엑스맨] 관련 판권은 20세기폭스 측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들이 자발적으로 판권을 마블측에 이임하지 않는 한 [어벤져스]에서 스파이더맨이나 울버린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요.

한편 영화 속 크로스오버의 흥미로운 사례는 [어벤져스] 외에도 몇몇 작품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는 20세기 폭스의 대표적인 외계인 캐릭터를 한 작품에 출연시킨 영화로 1990년 코믹북을 통해 처음 소개된 이래 여러 플랫폼에서 다양한 장르의 게임으로 선을 보였습니다만 스크린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의외로 상당한 진통을 겪었습니다.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 ⓒ 20th Century Fox. All rights reserved.

특히 20세기 폭스사에서 [에이리언]의 4번째 작품으로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를 기획하려하자, [에이리언] 시리즈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인 시고니 위버가 강력하게 반발, 출연불가 선언을 하여 제작진을 당황시킨 일화도 있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어렵사리 [에이리언 프레데터]의 영화화가 확정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또 하나의 크로스오버 작품인 [프레디 대 제이슨]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입니다.

공포영화의 양대산맥인 [13일의 금요일] 시리즈와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두 주인공이 등장하는 [프레디 대 제이슨]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황당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전대미문의 크로스오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팬심을 자극, R등급의 공포물로서는 이례적으로 개봉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바 있지요.

[프레디 대 제이슨] ⓒ MMIII New Line Productions. INC. All Rights Reserved.

이에 자극을 받은 폭스사에서는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라는 빅 이벤트를 성사시키지만 글쎄요… 안타깝게도 [에이리언 프레데터]는 [프레디 대 제이슨]이 그러했듯 겉모습만 요란했지 실상은 그저그런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크로스오버는 성사시키기까지의 과정도 쉽지 않지만 개성강한 주인공들을 한 작품에 적절히 섞어놓은 작업도 만만치가 않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몇 년 후 개봉된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 2: 레퀴엠]은 PG-13등급의 한계 때문에 재미를 잃었다는 비평을 벗어나고자 R등급으로 올려 잔혹성을 대폭 강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전편만도 못하다는 평을 들었으니, 이 크로스오버라는 작업이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잘 아시겠지요?

실패한 크로스오버의 또다른 예로는 마블진영의 [어벤져스]에 필적할만한 DC코믹스의 [저스티스 리그]가 있습니다. 원작인 ‘저스티스 리그’는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그린 랜턴, 플래시, 아쿠아맨, 마션 맨헌터 등 DC코믹스의 대표적인 슈퍼히어로들이 힘을 합치는 내용인데, 후에 그린 애로우. 아톰, 호크맨, 파이어 스톰 등의 히어로들이 가세하게 되면서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갔지요.

이 작품은 1997년 CBS 방송국에서 TV 시리즈의 파일럿 방송으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는데, 경쟁사의 [어벤져스]보다는 무려 15년이나 앞선 셈입니다. 영화판 [저스티스 리그]에서는 그린 랜턴, 플래시, 파이어, 아이스, 아톰, 그리고 마션 맨헌터로 구성된 멤버를 선보였는데요, 그 당시 DC코믹스의 간판스타인 슈퍼맨이나 배트맨, 원더우먼 등은 각각 다른 영화사에 저작권이 종속되어 등장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영화는 단팥빠진 찐빵처럼 허전한 느낌을 주게 됩니다. 재미면에서도 TV용 영화의 한계, 그리고 기술력의 부재로 인해 최소한의 팬서비스에도 못미치는 작품이 되고 말았죠. 역시나 좋은 시도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던 크로스오버였습니다.

[저스티스 리그] ⓒ CBS. ALL RIGHTS RESERVED.

이렇듯 쟁쟁한 주인공들의 대결, 혹은 협력을 다룬 크로스오버는 팬들에게 있어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꿈의 이벤트이지만 이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작사로서는 판권문제를 정리해야 하는 어려움, 더 나아가 팬들이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더해져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럼에도 수년간에 걸쳐 꼼꼼한 기획을 통해 마침내 빛을 보게 된 [어벤져스]의 완성도는 내실과 외형적인 면에서 모두 기대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크로스오버를 시킬만큼 풍부한 문화컨텐츠를 가지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헐리우드의 기획력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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