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115
영화사를 돌이켜 보면 1967년의 한국영화계는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한국 최초로 장편 애니메이션의 지평을 열었던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 역시나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쥔 클레이메이션 [흥부와 놀부], 한국 괴수물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기덕 감독의 [대괴수 용가리] , 그리고 또 한편의 괴수물 [우주괴인 왕마귀]가 모두 1967년 한 해에 쏟아진 작품들입니다.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장르물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지요.
이 중에서 [홍길동]과 [흥부와 놀부], [대괴수 용가리]는 이미 소개한 바 있고, 오늘은 남은 한 작품, [우주괴인 왕마귀]에 대해 다루어 볼까 합니다. 사실 [우주괴인 왕마귀]는 조금 특이한 관점에서 다뤄져야 할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일단 괴수물의 범주에 들어가긴 합니다만 어찌보면 한국 최초의 SF영화로 알려진 1960년작 [투명인간의 최후]보다도 더욱 분명한 SF장르물의 색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나 외계인과 우주공간이라는 설정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 세기상사 All rights Reserved.
먼저 [우주괴인 왕마귀]의 스토리를 잠깐 살펴봅시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주에서 로켓 한 대가 지구를 향해 날아옵니다. 바로 감마성의 외계인들이죠. 딱 보기에도 마분지에 은색 락카칠을 한 가면을 뒤집어 쓴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구를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 전에 지구인들의 기술수준과 방어력 등을 알아보기 위해 괴물 한마리를 한반도 태풍의 한가운데로 투하하는데, 처음엔 사람만하던 이 녀석은 투하과정에서 무려 500배 이상의 크기로 성장합니다. (과학적 논리따윈 없습니다. 그냥 커질 뿐)
한편 내일이면 결혼식을 올릴 약혼녀와 뒹굴거리던(?) 오정환 소령(남궁원 분)은 괴물체의 등장에 의한 비상소집으로 황급히 귀대하게 됩니다. 막강한 공군의 화력이 괴물을 강타하지만 우주괴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도심파괴를 즐기다가 마침 홀로 결혼식장에서 청승떨다 도망가던 오정환 소령의 약혼녀를 납치해 신이 나서 손에 들고 다닙니다. 그리고 난리통을 틈타 빈집에서 무전취식을 하던 거지소년은 배짱 좋게도 우주괴인의 귀에 들어가 고막을 찢어놓는 등 괴물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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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꼬맹이 한명이 우주괴인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감마성인들은 지구의 방어력이 우수하다고 판단, '지구인의 평화와 행복을 빌어 주는 차원에서 괴물을 없애 주고 가자'는 온정주의의 일환으로 우주괴인을 자폭시키고 감마성을 향해 떠납니다. (아 눈물나게 고맙네 -_-;;) 감격의 조우를 마친 오정환 소령과 약혼녀, 그리고 거지소년은 사이좋게 길을 떠나며 끝을 맺지요.
이처럼 영화의 내용은 황당하면서도 유치찬란한 포스를 발산합니다. 특히나 핵폭탄 사용까지 고려하는 공군측의 고뇌와는 상관없이 소년 한명이 괴물을 타고 올라가 귀와 콧구멍을 헤집고 다닌다는 설정이 실소를 자아내지요.
[대괴수 용가리]가 일본 특촬팀의 기술력을 빌려 만든 나름의 메이저급 작품이었다면 [우주괴인 왕마귀]는 오로지 국내 자체 기술만을 가지고 제작한 실험작입니다. 필름도 흑백일 뿐더러 특수효과의 만듦새도 엉성하기 그지없어요. 괴수물의 절대적인 조건은 등장하는 괴물의 압도적인 파괴력일진데, 이 우주괴인은 그저 흉칙한 (그나마도 자꾸보면 정들어요 -_-) 외모에 쿠에엑! 하는 소리만 질러댈줄 알았지 공포감을 조성하는데는 역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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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영화는 잔재미에 비중을 두는것 처럼 보입니다. 이를테면 희극배우 김희갑-송해(네, 전국노래자랑의 그 송해 아저씨입니다) 콤비가 등장해 괴물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두고 서로의 마누라를 걸면서 내기를 즐기는 반인륜적 시추에이션은 영화의 내용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서 그 자체만으로 일종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형성합니다. (왕마귀라는 이름은 김희갑이 극 중에서 '저 왕마귀같은 녀석이..'라고 괴물을 지칭하는 장면에만 나옵니다)
그밖에도 난리통에 해산의 고통을 겪는 임산부와 급똥 신호에 신문지를 깔고 볼일을 보며 고통스러워 하는 남자의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시퀀스는 [우주괴인 왕마귀]의 장르적 베이스와는 다소 동떨어진 시퀀스라 볼 수 있지요. (아, 그 급똥 남자는 볼일을 다 보고 난 뒤 일어서다가 괴물을 보고 놀라 철퍼덕 주저앉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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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괴수 용가리]과 비슷한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생긴 표절 의혹과는 별개로 괴물이 오정환의 약혼녀를 한 손에 끝까지 들고 다니는 설정은 영락없는 1933년 작 [킹콩]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킹콩]은 킹콩과 여인의 묘한 감정에 초점을 맞췄지만 [우주괴인 왕마귀]는 여자를 그냥 들고 다닐 뿐이에요. 장난감처럼. 도중에 웨딩 드레스 복장을 한 약혼녀의 속옷이 살짝 드러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눈을 부릅뜨는 괴물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긴 하는데 영화의 진행과 별 관계는 없습니다. -_-
예산의 부족과 기술력의 한계를 만회하기 위해 비행기 출격장면 등 일부 난이도 높은 씬은 기록영화에서 짜깁기를 했고, 괴물의 움직임은 슈트메이션 기법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괴물옷을 입고 촬영해냈습니다만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이같은 장르물의 순수 국산화를 시도했다는 점 만큼은 높은 점수를 받을만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피식피식 웃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오는건 왜일까요? 이제는 이마저도 전 세계 어떤 비디오나 DVD로도 접할 수 없는 희귀영화가 되었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P.S: 다행스러운건 한국영상자료원에 35mm필름이 보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1.33:1 비율에 전체 러닝타임에서 약 7,8분 정도가 소실된 필름이지만 상영용으로도 무난한 상태입니다. 1998년 겨울에 열린 제2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고, 얼마전 시네마테크 KOFA에서도 특별상영을 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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