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에서 이어지는 정동길 골목은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가히 레퍼런스급의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습니다. 고궁 주변 특유의 운치와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교통의 편리성, 그리고 곳곳에 숨겨진 문화공간과 근대 건물로 인해 많은 볼거리들이 장점인 곳이기도 하지요.
흔히들 정동길 데이트 코스는 덕수궁의 입구인 대한문에서 시작됩니다. 시청역 2번 출구에서 조금만 걸어나오면 보이는 대한문 입구를 지나 오른쪽을 보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산책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어보도록 할까요?
정동길은 자동차와 사람이 같이 사용하는 이면도로이긴 합니다만 보도와 차도간에 분리대가 세워져 있어서 맘놓고 걸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통행하는 차량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 자동차로 인한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정동길 초입에서 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그림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감상도 하고 맘에 드는 그림은 구입도 할 수 있지요.
조금 더 걷다가 왼쪽을 보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옵니다. 서소문 옛 대법원 자리였던 이 곳은 2002년 새롭게 시립미술관으로 개장했는데, 1920년대 건물의 외관을 유지한 채 후면부만 증축해 각종 미술품과 공예품을 전시하는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르느와르 특별전을 관람하기도 했는데, 어지간한 전시회는 무료로 개방되고 있습니다.
이제 계속 앞으로 걷다보면 오른편에 정동극장이 있습니다. 이따가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곳에서는 각종 공연을 볼 수 있는 공연장과 더불어 1층에는 쌈지마당이라 불리는 곳에 '길들여지기'라는 카페가 마련되어 있고 2층은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분위기 좋은 식사나 커피를 마시기에 좋은 공간입니다.
조금 위로 올라와 오른쪽 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중명전이라는 옛 건물이 나옵니다. 원래 선교사들의 숙소였던 이 일대는 1897년에 덕수궁에 편입되었다가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고 중명전 하나만 보존되고 있습니다. 을사조약과 헤이그 특사파견이 이루어진 역사 속의 산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 정동길로 나와서 가던 길로 올라가면 캐나다 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520년이 된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거목이지요.
정동길의 끝자락에는 경항아트힐이 있습니다. 원래은 정동시네마라고 불린 곳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찾는이가 별로 없어 결국 폐관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본 작품이 작년 8월에 본 [토이 스토리 3]였군요. 왠지 좀 섭섭해집니다.
정동길 일대에는 유명한 음식점들도 몇 개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아하바 브라카입니다. 이 곳은 둘로 나뉜 음식점을 통칭하는 말인데, 1층이 아하바, 지층이 브라카로 나뉘어 있지요. 저는 브라카만 가 봤는데 이곳에서 맛있는 함박 스테이크를 먹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리고 브라질 음식전문점인 이빠네마도 있고,
국수전문점인 정동국시가 있으며,
알뜰한 연인들을 위한 분식점 로뎀나무도 있습니다. 여긴 떡볶이전골로 유명한 집인데요, 사실 전골이라고 해봐야 여느 즉석떡볶이와 다른건 없습니다. 다만 이곳의 특징은 분식집 같지 않게 분위기있고 잘 꾸며진 레스토랑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며, 1인분에 3500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라는 매력이 있지요. 메뉴도 다양한 편이어서 여친을 데리고 가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양도 푸짐한 편. 다만 뒷맛이 좀 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너무 바짝 끓이지 말고 어느 정도 익으면 가스불을 끄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정동극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곳에서는 현재 [미소]이라는 뮤지컬을 상영중입니다. 고전 판소리인 '춘향전'을 뮤지컬로 각색한 이 작품은 현재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뮤지컬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왜 외국인들이 좋아할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실제로 극장안에는 외국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중국에서 온 단체 여행객들을 비롯, 중국계나 유럽계, 북미에서 찾아온 관객들도 더러 보이더군요. 이렇게 다양한 인종의 관객들이 작품을 감상하러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도 흔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미소]는 일반적인 뮤지컬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일반적인 뮤지컬이 배우들이 가창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반면, [미소]는 안무와 퍼포먼스적인 측면에 훨씬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거든요. 아마도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건 이렇게 언어적인 장벽이 없다는 것이 큰 이유일 겁니다. 대사나 노래로 내러티브가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처음 시작에서 '춘향전'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다국어로 자막처리해 관객에게 인지시킨 후 본 공연이 시작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더군요.
ⓒ 정동시어터 All right Reserved.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한국 전통뮤지컬이라는 특성에 맞게 [미소]는 한국 전통의 음악적 요소가 총 집결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소리에 맞춘 군무와 탈춤, 전통악기를 이용한 협주곡, 그리고 사물놀이까지 외국인들의 눈에는 굉장히 이색적인 문화체험을 경험케 하는 무대인 셈이지요. 특히 다소 짧다고 느껴지는 춘향전의 이야기가 마무리 될 무렵 이몽룡과 춘향이의 결혼식 장면에서 연결되는 사물놀이패들의 무대는 관객참여를 이끌어내면서 대단히 다이나믹한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습니다. 마치 관객들이 실제 결혼식을 즐기는 듯한 느낌에 빠져든다고나 할까요.
ⓒ 정동시어터 All right Reserved.
모든 공연이 마쳐지고 출연배우들이 1층에서 관객들과 함께 강강술래를 추고 사진도 함께 찍은 뒷풀이 시간이 있다는 점도 [미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서양식 뮤지컬과는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지만 전통문화를 접목시킨 이러한 시도가 매우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랜만에 정동 데이트의 좋은 하이라이트를 제공해 준 공연이었습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길 원하신다면 강추하는 뮤지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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