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불로불사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에서 영원한 삶은 인간의 빗나간 욕망과 결부되어 묘사되곤 한다. 가까운 예로서 뱀파이어 영화의 주된 설정으로 등장하는 불로불사는 대부분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그려지며, 불사신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견지했던 [하이랜더]에서는 주인공이 궁극적 힘을 얻게 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서 보통 사람처럼 늙어갈 수 있다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나탈리 배빗의 원작을 영화화한 [터크 에베레스트]에서도 주인공 위니는 불로불사의 삶보다는 미완성이지만 유한한 삶을 선택한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영원한 삶이란 동경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금기나 두려움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영원히 늙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맨 프럼 어스]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지방의 소도시에서 10년째 대학교수로 재직해오던 올드맨이 돌연 사직서를 내고 이삿짐을 꾸린다. 올드맨의 갑작스런 이사소식에 놀란 직장 동료와 학생들은 그가 떠나기 전날 송별회를 위해 올드맨의 집에 모인다. 신학자와 역사학자, 생물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동료들과의 대화 도중, 올드맨은 마침내 마을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14000년을 살아온 원시시대의 인간이며, 10년을 주기로 자신이 노화하지 않음을 눈치채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옮겨다닌다는 것.
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얘기를 들은 동료들은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올드맨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벼운 대화로 시작된 이들의 토론은 점차 진지하게 흐르게 되는데, 급기야 신과 종교에 대한 문제로 넘어가면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과연 14000년을 산 올드맨에게 있어서 늙지않는 삶이란 축복이었을까?
20만 달러의 초저예산으로 완성된 만큼 이 작품은 볼거리로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다. [맨 프럼 어스]는 다분히 연극적 구성으로 짜여진 작품으로 이야기의 90%는 올드맨(작명센스가 일품)의 집에 모인 인물들의 대화로 진행되는데,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구성임에도 흥미로운 소재와 촘촘한 각본, 그리고 충격적인 화두를 제시하는 덕택에 몰입도는 꽤 높은 편이어서 아마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느덧 올드맨 일행의 대화에 참여하는 참관자가 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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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단순히 흥미 위주가 아니라 진지한 톤으로 종교 및 신의 존재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보내고 있는 [맨 프럼 어스]는 신앙심 깊은 일부 관객들으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공분을 살 소지가 다분하다. 미국 개봉당시의 제목인 'Jerome Bixby's The Man from Earth'에서 볼 수 있듯, 이 영화는 각본가 제롬 빅스비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작품이다. 빅스비라는 인물이 평생에 걸쳐 SF 소설이나 관련 잡지의 편집자로 활동하거나, [환상특급], [스타트렉]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종교와 과학의 대칭점에서 과학의 편에 철저히 고착한 그의 성향을 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감독인 리처드 쉔크만은 [맨 프럼 어스]가 인터넷을 통한 공유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기를 바란다는 이례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는데, (대신 공식 홈페이지에는 도네이션 버튼이 마련되어 있다) 환경 다큐멘터리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일반 극영화가 인터넷 공유를 통해 관람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역시나 비상업적 성격을 띈 본 작품의 의도가 단순한 예술혼을 강조하기 위한것만이 아님을 의심케 한다. 14000년을 살아왔을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그럴듯한 논리전개에 있어서 확인되지 않은 민감한 가설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시도는 관점에 따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유명한 각본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쌓아온 제롬 빅스비의 마지막 유작 답게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14000년에 이르는 거대한 인류역사를 마음껏 아우르고 있다는 점은 [맨 프럼 어스]의 큰 장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영원이라는 개념앞에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미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대중적이진 않지만 꽤나 독특한 맛이 있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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