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내용을 미리 알고 보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는 애니메이션입니다. 따라서 내용의 일부라도 알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리뷰를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1999년 영화계의 화두는 단연 [매트릭스]였다. 지금의 삶이 현실이 아닌 가상이고, 실은 컴퓨터에게 기억을 지배당해 말그대로 '배양'당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발상은 우리의 삶 자체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자, 가상현실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기억과 존재, 그리고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구상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와 [공각기동대]를 참고하였음을 당당히 밝혔는데, 이같은 80년대 일본 아니메의 사이버 펑크 문화가 녹아있는 [매트릭스]는 아이러니하게도 향후 제작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또다른 영향을 줌으로 일종의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제가페인]은 바로 사이버 스페이스와 인간의 존재라는 [매트릭스]적인 테마를 소재로 만든 제패니메이션으로 2006년 하반기에 선라이즈에서 제작한 야심작이다. [공각기동대]에서 [매트릭스]로 이어진 '기억의 디지털화'는 [제가페인]을 통해 또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 サンライズ・プロジェクトゼーガ・テレビ東京 /Bandai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제가페인]은 서버속의 인간들이 '제가페인'이란 로봇을 개발해 자신들의 존재가 백업되어있는 서버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의 '메카닉 애니메이션'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 되어있다. 메카물에 세기말적인 테마, 거기에 양자 물리학까지 접목시켜 꽤나 복잡한 세계관과 철학적 개념을 가진 일본 아니메 특유의 색채가 드러나는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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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수많은 의문점들은 쿄우라는 캐릭터로 인해 분출되어 끊임없이 고뇌하며 적들과 싸우는 과정속에 스스로의 존재감에 대한 확신을 세워나가며, 끝내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획득하게 된다.
물론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복선과 암시,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릴정도로 복잡한 세계관은 이 작품이 방영당시 큰 인기를 끌지 못한 이유를 대충 짐작케 한다. 비슷한 테마인[공각기동대]를 두배나 복잡하게 꼬아놓은 [이노센스]가 흥행에 참패했듯이 뭐든 지나치면 관객은 외면하는 법이니까.
[제가페인]은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메카닉 애니메이션이지만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모든 로봇의 등장씬은 CG로 처리했다. 이같은 CG의 사용은 메카닉의 개성을 없애는 결과를 낳았으며, 셀 작화로 처리된 캐릭터와의 부조화도 단점으로 작용한다. 사실상 메카물로서 [제가페인]에게 기대치를 둔다면 이 작품은 그 기대를 외면할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에선 로봇의 멋진 등장도, 기억에 남을 만한 전투씬도 없으며, 심지어 어떤 카리스마도 '제가페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탄탄한 플롯, 적당히 애절한 러브스토리, 개성을 잘 살린 캐릭터 등을 생각한다면 [제가페인]은 충분히 매력있는 작품이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곳곳에 심어놓은 반전과 드라마적인 요소를 잘 살리고 있으며, 양자 전송으로 인한 데이터의 손실로 환체(데이터상의 인체)가 손상을 입는다는 설득력있는 설정등이 이 작품의 꼼꼼한 완성도를 지탱하고 있다. 물론 성우들의 연기도 나쁘지 않다.
결론적으로 [제가페인]은 그간에 사용되었던 사이버 공간의 소재들을 모두 가져다 쓰고 있는 애니메이션이긴해도, 진부한 느낌을 주지 않는 장점을 지녔다. 같은 세기말적 공간을 다룬 [에반게리온]에 비해 다소 가볍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마음에 든다. 마지막 장면까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기에 초반부의 다소 루즈한 전개에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감상해 보시길 권한다.
* [제가페인]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サンライズ・プロジェクトゼーガ・テレビ東京 /Bandai Entertainment.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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