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실험은 계속된다
2020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가 ‘코로나’ 였다면, 영화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는 단연 ‘인버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 세계를 강타한 초유의 팬데믹 사태를 맞이하면서 마블의 [블랙 위도우]를 비롯, DC의 [원더우먼 1984]나 이언 프로덕션의 [007 노 타임 투 다이] 같은 기대작들의 개봉이 연기되는 가운데, 이제는 그 이름만으로도 흥행보증수표가 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테넷]은 세 차례의 연기 끝에 늦여름 시즌 개봉을 감행했다.
올 한 해 가장 큰 관심을 모았음에도 예고편만으론 영화의 장르나 성격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어려웠던 [테넷]은 평소 제임스 본드 무비를 좋아한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놀란의 첫 번째 첩보물이다. 간지나는 수트를 입은 스파이와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무기밀매상, 그리고 주인공의 조력자와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금발 미녀 등 외형적으로는 첩보물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충실하게 수용한 영화다.
그러나 늘 영화적 실험을 시도하는 놀란의 성향대로 [테넷] 역시 평범한 첩보영화는 아니다. 여기엔 불변의 물리현상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역행하는 ‘인버전’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캐릭터의 구축이나 임무 수행의 과정과 같은 영화의 서사 대신 시간을 흐름을 바꾸는 인버전 개념과 이를 활용한 ‘시간의 싸움’을 표현하기 위해 현란하고 복잡한 비주얼로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이는 대단히 기이하고도 진귀한 경험이다. 지금까지 시간의 순행과 역행의 흐름을 동시에 한 화면에 담아냈던 영화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놀란 특유의 시각적 스토리텔링이 극대화 된 [테넷]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불친절하며 전개가 빠르다. 시간의 순행과 역행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의 흐름은 소싯적 물리학 좀 배웠다 하는 관객이라 할지라도 아차하는 순간 놓치기 십상이다. 한 번 놓친 흐름은 다시 따라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불친절한 영화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테넷]에는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가 꽤 많이 숨겨져(?) 있다. 이를테면 영화가 시작하면, 워너 브라더스의 로고는 빨간색으로, 신카피의 로고는 파란색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영화 상에서 시간의 순행 시점은 빨간색, 역행 시점은 파란색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탈린에서 주도자와 사토르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장면이나 스탈스크12의 협공에서 레드팀과 블루팀으로 나누는 것이 그 예이다.
아마 추측컨데 시간협공이 펼쳐지는 후반부의 스탈스크12 전투에 이르렀을 때 관객의 절반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좌석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두뇌를 가까스로 진정시켜야 하는 고충과 함께 말이다. 이쯤 되면 관객에게 대놓고 재관람을 위한 티켓을 결제하라고 강요하는 셈이라 놀란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테넷]은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인 영화는 될 수 없다. 극단적으로 취향을 타는 작품이며, 순방향의 깔끔한 스토리 텔링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보고 있기가 괴로운 영화인 반면 지적 유희와 인버전의 시각적 묘미에 매료된 관객에게는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다. 이거 하나 만큼은 확실해 졌다. 흥행성을 담보하는 블록버스터에서 이 정도로 실험적인 전개를 선보이는 건 크리스토퍼 놀란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블루레이 퀄리티
디지털의 시대에 여전히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답게 아리플렉스765와 파나비전 슈퍼 70 및 아이맥스 카메라를 조합해 온전히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각 필름 소스를 DI 시킨 블루레이 영상 퀄리티는 일단 긴 말이 필요 없이 레퍼런스급이다. 물론 현 시점에 4K UHD가 공존하기 때문에 4K 영상의 그것과 비교하기에는 살짝 후달리는 감이 없진 않으나 블루레이의 절대적 기준점을 놓고 본다면 [테넷] 블루레이의 경이로운 화질을 능가할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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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임팩트가 느껴지지 않은 일반적인 시퀀스도 아리플렉스765를 이용한 65mm 필름으로 촬영된 지라 아이맥스 시퀀스와의 괴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영화 전반에 걸쳐 균일한 디테일의 영상을 보여준다. 절제된 콘트라스트와 싱싱한 필름의 질감을 그대로 담아 온 듯한 화면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블루레이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화질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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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스펙은 DTS-HD MA 5.1로 어쩐지 좀 평범한 스펙처럼 느껴진다.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에서 제기되는 가장 큰 논란거리 중 하나가 바로 사운드믹싱과 관련된 부분인데, 특히나 [테넷]은 영국의 ‘더 가디언’지에서도 지적했듯이 인물들간의 대사가 주변음이나 스코어에 묻혀 웅얼거린다는 지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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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블루레이에서는 극장 상영 당시 지적되었던 문제점은 많이 개선되었다. 돌비 애트모스가 아니라 DTS-HD MA 5.1로 수록한 것은 (이는 4K UHD 판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감독이 이 포맷을 더 선호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DTS-HD MA 5.1의 분리도나 사운드 믹싱은 이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단점 아닌 단점으로는 정상적인 청취 환경에서의 볼륨보다 전체적인 음역대가 약간 높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간만에 서브우퍼의 울림 때문에 아랫집 눈치를 봐야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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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의 대사 전달은 극장에서보다는 훨씬 수월하며, 일부 대사가 스코어에 묻히는 현상은 놀란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영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듯 하다.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액션 장면에서는 확실한 타격감과 폭발음을 선사하는 뛰어난 사운드를 청음할 수 있다.
스페셜 피처
별도의 디스크로 제공되는 스페셜 피처는 예고편을 제외하면 약 1시간 15분 가량의 ‘Looking At The World In A New Way’가 전부다. 이 비하인드 영상은 총 13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을 비롯해 촬영감독인 호이트 반 호이테마, 그리고 주연 배우인 존 데이비드 워싱턴, 케네스 브래너 등이 나와 [테넷]의 스토리와 초기 제작단계, 캐스팅 및 로케이션, 특수효과, 편집,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 등에 대해 설명해 준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먼저 ‘Mobilizing the Troupe’에서는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다. 주도자 역의 존 데이빗 워싱턴은 [블랙클랜스맨]의 주연을 맡으면서 이름을 알렸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믿기지가 않았다고 한다. 서플먼트에서 워싱턴의 표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들떴었는지를 단박에 느낄 수 있을 정도. 더불어 놀란의 작품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마이클 케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 대배우에게 얼마나 큰 애정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들려준다.
‘The Proving Window’는 [테넷]의 촬영기법에 대해 알려주는 영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이맥스 촬영을 해야 할 때 배우들이 느끼는 감정인데, 모종의 압박감을 느낀다고 한다. 큰 필름 통을 몇 분 단위로 갈아 끼워야 하기 때문에 테이크를 찍을 때 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래서 필름에 대해 아까운 인식을 가지게 되어 연기에 더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것. 더군다나 호이테마 촬영감독은 핸드헬드를 선호하는 편인데, 그 무거운 아이맥스를 혼자 들고 뛰어다녔다고 한다. 미식축구선수 출신인 존 데이빗 워싱턴이 호이테마를 운동선수급이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Entropy in Action’는 [테넷]의 액션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메이킹 필름이다. 액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많은 영화는 아니지만 [테넷]의 액션은 시간의 역방향과 순방향이 섞여 있는 대단히 기묘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놀란의 설명을 듣던 액션 코디네이터 역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고 한다. 스턴트맨들과 배우들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에 프리포트의 액션이나 탈린의 카체이싱 같은 장면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여행길이 막혀버린 요즘 같은 시대에 ‘Traversing the Globe’는 또 다른 대리만족을 줄 것이다. [테넷]은 7개국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 작품으로 각 나라의 이국적인 풍미가 물씬 풍기는 첩보물이기도 하다. 탈린, 아말피, 뭄바이 등 (주: [테넷]은 뭄바이 영화 역사상 최초의 항공 촬영이 이루어진 영화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었던 각 국의 로케 일지가 기록된 영상이다.
스페셜 피처 목록 (Looking At The World In A New Way)
1. The Principle of Belief (04:06)
2. Mobilizing the Troupe (06:35)
3. The Approach (04:40)
4. The Proving Window (04:46)
5. The Roadmap (05:06)
6. Entropy in Action (10:48)
7. Traversing the Globe (12:28)
8. How Big a Plane? (04:48)
9. The Dress Code (03:52)
10. Constructing the Twilight World (05:27)
11. The Final Battle (04:11)
12. Cohesion (05:37)
13. Doesn't Us Being Here Now Mean It Never Happened? (03:49)
총평
잘난 듯 리뷰를 쓰긴 했어도 필자 역시 영화를 보고 나서는 뭔가 끝내주게 멋진 영화를 본 거 같은데, 내가 뭘 봤는지 이해가 안 되는 느낌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결국 n차 관람이 필수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테넷] 블루레이는 구입해도 본전은 확실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블루레이 포맷의 한계를 가늠하는 AV적인 요소는 현 시점에서 최고의 퀄리티로 나와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넷] 블루레이를 통해 다시금 관객으로서 영화에 ‘인버전’ 하는 시간을 갖도록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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