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 퀸의 홀로서기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킬링 조크]는 배트맨의 동료이자 고든 총장의 딸인 바바라 고든이 배트걸로 활동하던 중 조커의 총탄에 의해 하반신 마비가 되는 충격적 이벤트를 담고 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바바라는 휠체어에 타는 장애를 갖게 되지만, 그러한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고담시의 크라임 파이터 ‘오라클’이라는 또 다른 아이덴티티를 획득, 헌트리스, 블랙 카나리와 함께 여성 멤버들로 구성된 히어로 팀 ‘버즈 오브 프레이’를 이끈다.
이처럼 '배트맨'의 세계관 속에서 여성판 스핀오프로 출발한 '버즈 오브 프레이'는 다분히 페미니즘 성향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서 DC코믹스 중에서도 독특한 팀업 콘텐츠로 평가 받는다. 본 작품의 실사화는 [스몰빌]의 성공에 착안해 제작된 TV 시리즈 [버즈 오브 프레이 (2002)]로 한 차례 시도된 바 있는데, '배트맨과 조커가 없는 고담시’라는 흥미로운 기획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는 평이한 수준에 머물러 13화의 짧은 회차로 조기 종영되었다.
그로부터 18년 뒤, ‘버즈 오브 프레이’의 이야기를 다시금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 올 해 DC Films에서 선보인 [버즈 오브 프레이: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이다. 이 작품은 [저스티스 리그]의 실패 후 솔로무비에 주력했던 DC가 다시금 확장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이용한 팀업무비로 돌아온 작품인데, 여기에서는 원작의 오라클이 빠지고, 대신 블랙 카나리와 헌트리스, 카산드라 케인, 그리고 르네 몬토야가 팀을 이룬다.
무엇보다 본 작품에서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을 하드캐리한 할리 퀸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아마도 원더우먼과 더불어 흥행성이 입증된 DC의 여성 캐릭터를 활용함과 동시에, 실패했다고 판단되는 자레드 레토의 조커를 지우려는 시도로 보이는데, 영화의 플롯도 조커와 이별한 후 홀로서기를 하는 할리 퀸의 동선을 따라가고 있다.
주요 플롯은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린 범죄단의 두목 로먼(블랙 마스크)과 할리 퀸, 다이아를 훔진 자, 그리고 로먼에게 복수를 원하는 자, 경찰 등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겪는 내용이다. 팀업무비이다 보니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이러한 캐릭터의 개성과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기엔 플롯의 흡입력이 다소 약한 편이다.
원작의 캐릭터들은 영화로 오면서 조금씩 윤색되었는데, 이를테면 헌트리스는 암울한 과거사를 가진 다크히어로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허당의 반전매력이 있고, 원작에서 백인이었던 블랙 카나리는 흑인으로 바뀌었으며, 배트맨과 1:1 맞짱이 가능할 정도의 무술가인 카산드라 케인은 단순한 소매치기 소녀로 탈바꿈되어 가장 많은 논란을 빚었다. 게다가 명색이 ‘버즈 오브 프레이’인데 정작 이야기의 구심점을 이루는 건, 팀의 멤버가 아닌 할리 퀸이라는 점도 원작의 팬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원작의 레퍼런스를 차용한 몇몇 장면의 시도만큼은 눈 여겨 볼만 한데, 예를 들어 할리 퀸이 롤러 더비에 참여하는 장면은 원작에서 할리 퀸이 롤러 스케이트를 즐긴다는 설정에서 따온 것이며, 극 중 경찰서를 급습한 할리 퀸이 입은 옷은 코믹스 중에서 [인저스티스]의 코스튬을 차용한 것이다. 이 외에도 박제 비버인 ‘버니’나 블랙 카나리의 ‘카나리 크라이’ 역시 원작에 담겨진 설정들이다. 이런 소소한 사실을 발견하는 경험은 팬들에게는 꽤 즐거운 요소가 될 듯.
또한 그래픽 노블을 넘겨보듯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따라가는 초반부의 전개는 훌륭하다. 훨씬더 스타일리시한 액션에 다시 보는 마고 로비의 할리 퀸은 여전히 잘 어울리며, 전 남친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된 여성으로의 자아를 확립하는 서브 플롯 역시 최근 헐리우드의 흐름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잘 갖춰진 양념이 메인 디쉬에 풍미를 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수어사이드 스쿼드]보다는 낫지만 단점과 장점이 너무 명확한데다 이것이 대충 얼버무려져 있어서 뭔가 모호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엄청나게 재밌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봐줄 만한 영화’랄까.
블루레이 퀄리티
[버즈 오브 프레이]는 [블랙 스완], [아이언맨], [베놈] 등을 촬영했던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감독을 맡아 3.4K 해상도로 디지털 촬영한 작품이다. 내용면에서의 호불호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색감과 미술에 있어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호평을 받은 만큼 비주얼적인 강점이 잘 드러나는 블루레이 타이틀이다. 화면비는 2.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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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디테일은 촘촘하고 깊이가 있으며, 컬러 밸런스가 잘 잡힌데다 색포화도가 높은 화면을 보여준다. 할리 퀸의 허여멀건한 분장 너머로 마고 로비의 매끈한 피부가 느껴질 정도로 표현력이 괜찮다. 밝고 아름다운 야외의 도시 풍경에서부터 야간의 테마파크에 이르기까지 낮과 밤의 모든 시각적인 요소들에 있어서 만족감을 주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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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 애트모스를 채용한 사운드는 기대치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필요할 때 빵빵 터져주는 서라운드 효과의 기본은 잡혀 있으나 가끔 대사가 대화 도중에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 있다. 반면 리어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풍부한 공간감을 불러 일으키며 경찰서 습격씬과 같은 장면에서는 무게감 있고 단단한 저음을 우퍼에 담아 박력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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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피처
먼저 ‘Birds Eye View Mode’는 굉장히 알찬 기능으로서 영화 본편을 재생하면서 감독 및 배우의 코멘터리 및 트라비아, 비하인드 씬 등 영화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아기자기한 비주얼 구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Birds Of Prey: Birds Of A Feather’는 [버즈 오브 프레이]에 대해 스텝과 배우들이 간력하게 설명하는 코멘터리 영상이다. 특이하게도 캐시 얀 감독을 비롯해 제작자, 배우, 각본가 들이 대부분 여성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라 영화가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익히 짐작 가능할 듯.
‘Grime And Crime’은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관한 제작 영상이다. K.K 바렛이 이번 작품에서 프로덕션 디자인-흔히 미술이라고 부르는-을 맡았는데,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는 평소에 다루지 않았던 다양한 팔레트와 물리적 환경을 시도해 마치 팝아트 같은 고담시를 창조해 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본 작품의 가장 큰 강점 증 하나가 바로 이 미술적인 부분이라 눈여겨 볼만한 영상이다.
‘Romanesque’는 영화의 메인 빌런인 로만 시오니스에 대해 다룬다. 명배우 이완 맥그리거가 맡은 이 캐릭터는 원작에서도 B급 악당에 불과하긴 하지만 본 작품에서도 조금 진부하게 다뤄진 감이 없지 않은데, 금수저로 태어나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희극적이면서도 순식간에 잔인한 사람으로 돌변하는 예측불허의 악당으로 그려진다. 할리 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리 멘탈 관종’.
‘Gag Reel’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특전이다. 원래도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이긴 하지만 촬영장에서의 훈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영상이다.
스페셜 피처 목록
- Birds Eye View Mode (109:00)
- Birds Of Prey: Birds Of A Feather (08:28)
- Romanesque (04:56)
- A Love, Skate Relationship (04:53)
- Grime And Crime (10:33)
- Sanity Is Sooo Last Season (07:34)
- Wild Nerds (05:57)
- Gag Reel (02:26)
총평
고담시의 세계관을 좋아하는 필자로선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감도 없진 않은데, 이례적으로 R등급을 택한 만큼 캐릭터를 소모하는 방식에 있어 [데드풀]처럼 좀 더 과감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코로나19 사태로 금년 극장가의 블록버스터급 작품들이 모조리 연기된 마당에 선택할 만한 작품이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버즈 오브 프레이]의 발매는 그나마 감사하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블루레이 퀄리티도 준수하며 부가영상도 제법 공들여 담아놓은 편이다. 무엇보다 할리 퀸의 매력을 다시금 감상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영화를 볼 가치는 있으니 이 기회에 감상해 보는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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