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3부작을 완성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간혹 속편까지는 잘 갔어도 마지막 여정인 3편의 방점을 찍는데 성공한 사례는 글쎄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이나 [본 얼티메이텀] 정도? 실패한 사례야 수도 없이 많죠. [로보캅 3], [터미네이터 3], [미이라 3], [블레이드 3] 등등.. 흥행에 성공한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 끝에서]나 [트랜스포머 3], [스파이더맨 3] 같은 작품들도 잘 만든 영화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전 그 유명한 [스타워즈 Ep.6: 제다이의 귀환]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3부작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4년전, 전 세계를 공황상태에 빠뜨린 [다크 나이트]는 확실히 배트맨 3부작의 기대치를 한계까지 끌어 올려 놓았습니다. 잠시 외도를 택한 [인셉션]의 후덜덜한 완성도를 보며 배트맨 사가의 최종장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어떤 작품이 될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단 말이죠.
이제 그 결과물을 확인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전편으로부터 8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고담시는 평화를 찾았고 그 평화의 근간에는 하비 덴트의 죽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대가로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을 지웠고, 스스로도 레이첼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두문불출하는 폐인이 되어 웨인 저택의 한 구석에서 망가져가고 있지요.
ⓒ Warner Bros. Pictures/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얼핏보면 평화의 시대이지만 이 평화는 어딘지 불안해 보입니다. 현재의 평화는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아마 전작의 엔딩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그 의미를 하시겠지요) 그러던 중 베인이 나타나 고담시를 접수합니다. 교활하고 음흉한 조커와는 달리 베인은 저돌적이고 치밀하며, 냉혹합니다. 고담시는 다시 영웅을 필요로 하고 웨인은 또다시 배트맨이 됩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배트맨 비긴즈]를 [다크 나이트]의 화법으로 이야기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직한 테마와 음울함은 여전하지만 구성과 진행에 있어서는 슈퍼히어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는 뜻이지요. 이 말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내려질 평가가 [다크 나이트] 때와는 다를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실 [다크 나이트]는 한편의 범죄 느와르로서 완벽한 장르영화의 성격을 소화해냈습니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허를 찔린 겁니다. 아니 슈퍼히어로물에서 어떻게 이런 영화가 나올 수가 있지? 라는게 대다수 관객들의 생각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변칙적인 수법은 공교롭게도 놀란의 사실주의적인 노선과 융화되어 궁극의 히어로물에 대한 비정상적인 판타지를 심어 주었고, 차기작 역시 [다크 나이트]와 같은 영화가 되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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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엄밀히 말해 [다크 나이트]는 슈퍼히어로의 세계에 있어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놀란 자신이 그 점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을테지요. 그는 [배트맨 비긴즈]가 [다크 나이트]와 달랐듯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도 앞선 작품들과는 다른 작품으로 가는게 맞다고 생각했고, 의도대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다크 나이트]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화입니다. 마치 마이클 만의 [히트]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어떤 영화가 더 뛰어난지를 논하는 것이 넌센스이듯이, 두 영화 사이에는 장르적 차이 외에도 주제의식과 스타일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느껴집니다.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사이에 어떤 영화가 더 우수한가에 대한 질문은 현 시점에서 무의미한 셈이죠. 이건 완성도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간혹 리부트되는 영화들에 대해 왜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냐고 궁시렁대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그건 이야기의 시작을 담은 모든 영화들이 지닌 공통점입니다. 캐릭터의 구축과 상황설명이 필연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완결편은 이야기의 완성이라는 부면에서 받는 여러가지 제약이 있습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도 예외는 아닙니다. 완결편의 통속적인 면을 어느 정도는 답습할 수 밖에 없고, 그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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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대해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가 독립적인 영화로서의 완성도 보다는 완결편으로서의 완성도에 더 공을 들인 작품이라는 사실을요. 아쉽게도 [다크 나이트]와 같은 장르영화의 본연에 충실하기 보단 ‘배트맨 사가’의 완결편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거죠. 이 지점에서 불만을 터트릴 관객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하지만 완결되는 3부작의 관점에서 볼 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충분히 훌륭합니다. 거대한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솜씨는 여전하며 액션의 스케일도 더 커졌습니다. 여러모로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린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3]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오히려 [다크 나이트]보다는 더 대중 친화적인 영화입니다. 인물들의 고뇌와 드라마를 엮어가는 방식에도 멋과 기품이 있습니다. [어벤져스]와는 또다른 느낌이 나죠.
그러나 확실히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편집은 좀 불만입니다. 버릴게 거의 없이 꽉 차 있던 [배트맨 비긴즈]나 [다크 나이트]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감독이 욕심을 부린 탓인지 너무 많은 인물들을 너무 복잡한 이야기 속에 투입시켰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수습불가의 사태에 이른건 아니지만 그간 모든 이야기를 손 안에서 가지고 놀았던 놀란의 능력에 비추어 보자면 이번엔 이야기가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간 느낌입니다. 10% 정도 덜 다듬어진 러프컷 같달까요.
ⓒ Warner Bros. Pictures/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이는 곧 캐릭터의 낭비로도 연결됩니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잘 살릴 수 있었던 캣우먼이 중반 이후로 평범한 헐리우드 히로인으로 희석되는 것이나 초반부터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존재감을 발산하던 베인이 모종의 캐릭터와 엮이면서 성격이 급변하는건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닙니다. 캐릭터의 소모가 너무 급작스럽기도 하거니와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어쩌면 이 모든 불만과 아쉬움은 이 영화가 너무 짧은 시간 –그렇지만 무려 164분이라는- 에 담아내기엔 감독의 포부가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쫓아가기에도 바쁜 와중에 전작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던 코믹스 원작에의 팬심마저 이번에는 너무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드러나거든요.
때론 울컥거리면서 제대로 된 물건을 만났나 싶다가도 이 부분은 좀 아쉽지 아니한가.. 이런 감정의 교차가 반복되면서 2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은 언제 끝났는지 훌쩍 지나가 버리니 과연 [배트맨 비긴즈] 3부작의 최종장으로서는 손색이 없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다크 나이트] 이후 4년간은 이 작품을 기다리는 ‘희망’이라도 있었건만 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그러한 설레임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뭘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P.S (약 스포일러 있습니다)
1.역대 배트맨 무비 중에서 배트맨의 출연 분량이 가장 적은 작품일 듯 합니다. 초반의 컴백씬과 베인과의 첫대결, 그리고 막판 하이라이트가 전부라니..
2.마리옹 꼬띠아르는 정말 없어도 될 캐릭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려 오스카 주연상까지 수상한 여배우의 연기도 실망스럽지만요, 그 역할이란 것이… 너무 작위적이에요.
3.놀란의 특징 중 하나는 왕년의 한물간 스타를 출연시킨다는 거죠. [배트맨 비긴즈]의 룻거 하우어, [다크 나이트]의 에릭 로버츠, [인셉션]의 톰 베린저에 이어 이번에는 매튜 모딘을 선택했더군요.
4.빵터지는 유머가 많이 줄긴 했습니다만 배트맨의 대사 중 ‘이런 기분이었군화…’ 아주 미치겠더군요.
5. 아.. 베인. 그는 순정마초였던 것입니다. 이런 낭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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