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기억을 한 2~30년 뒤로 돌려보겠다. 필자가 국민학생 때 (그렇다. 당시는 초등학생이 아닌 국민학생이었다)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하나 있었다. 학생들 준비물과 학용품은 물론 20원짜리 전자오락기까지 두어대 들여놔 꼬꼬마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그 집의 뽑기 아이템은 큰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필자도 여느 동네 꼬꼬마들과 다르지 않아 그 문방구를 매일의 일과처럼 드나들던 단골이었다. 어느 날 그 문방구 사장님이 모처럼 대청소를 했던 모양이다. 문방구 한 구석에 먼지쌓인 장난감이며 만화책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순간 호기심이 생겨 이게 뭐냐고 물으니, 싸게 줄 터이니 골라서 사가라는 것이다.
뭣 땜에 그 날 문방구를 갔었는지는 몰라도, 난 그 먼지구덩이 속의 만화책 한 권에 눈이 갔고 꽤나 헐값에 그 책을 집어들어 집으로 왔다.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사온 낡은 만화책이 궁금했던지 훑어보시더니 “이거 박기준 만화네?” 아직도 이 사람 만화가 나와?” 하면서 아는 척을 하신다. 사실 그 당시 내가 아는 만화가는 김형배, 안제일, 고유성, 이세호 같은 SF 작가나 신문수, 윤승운 같은 명랑만화가가 전부였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집어 왔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책의 제목은 [두통이 만세]였다. 아마 표지에 ‘명랑순정만화’라고 써 있으니 이 책도 명랑만화 중 하나려니 하고 사온 모양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찡하다. 이런 게 감동이란 것일까. 만화책 한 권이 감동을 줄 수도 있구나. 부모님께서도 만화를 보시고는 무척 만족하신 눈치다. 그렇게 문방구 재고떨이로 건져왔던 [두통이 만세]는 몇 년간 내 서고에 꽂혀 있었다. 어찌나 자주 읽었던지 표지와 앞에 한 두 장 정도는 떨어져 나갔던 것 까지 기억한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한다. 나도 그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로봇이니 대백과니 하는 것들은 유치하게 생각되었고, 잘 나가는 일본만화를 봐야 뭔가 더 세련된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그렇게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내 서고의 만화책은 입시 공부를 핑계로 사촌동생에게 대부분 양도되어 버렸고, 그 이후로의 소식은 모른다. 아마 숙모께서 몽땅 버리셨거나 사촌동생 녀석이 엿바꿔 먹었겠지.
그러다가 나이가 더 들면서 철없던 시절에 읽은 그 만화들이 너무나도 그리워 다시 찾을 때 즈음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그 시절의 만화는 구하기 어렵다는 걸.
인터넷을 찾아 해매니 대략 다음의 정보가 눈에 띈다.
ⓒ 박기준
근데 뭔가 다르다. 내 기억에는 이게 아닌데… 또 다른 정보가 나왔다. 1980년대 초에 출간된 이서방문고의 [두통이 만세]다.
ⓒ 박기준 / 이서방문고
그래. 내가 본 건 이거다. 어느 자칭 전문가에게 문의해보니 이서방문고판 [두통이 만세]는 과거 출간되었던 [두통이 만세]의 재판본, 일종의 복간판이라는 거다. 문제는 이 놈의 이서방문고 만화가 출간부수를 적게 잡은 것인지 시중에 남아있는 책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수소문 끝에 두 명의 소장가를 발견했다. 어렵사리 접촉해 보니 절대 팔지 않겠단다. 한 명은 나중에 맘을 바꿔서 50만원을 내면 판다고 했다가 정작 구입의사를 밝히자 또 말을 바꿨다. 또 한 명은 언젠가 꼭 보여주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해놓고는 그대로 잠수를 타버리곤 연락을 받지 않는다. 결국 나는 구입을 포기했다.
시간이 좀 흘러… 책을 준비하면서 한국만화사에 대해 이런 저런 자료들을 훑어보게 되었다. 어느 정도 탈고가 될 무렵이라 보강차원에서 수집된 자료들이었는데 그만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당한 듯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데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거다. 누군가 이서방문고의 [두통이 만세]는 옛날에 나온 책의 재판본이라고 한 헛소리를 철썩같이 믿었던 게 실수였다. 내가 본 건 이서방문고의 [두통이 만세]. 애당초 이 책의 원제는 [두통이 만세]가 아니었다.
좀 헷갈리는 얘긴데 원래 이 작품은 [푸른하늘 저 멀리]로서 박기준 화백이 1970년대 ‘소년한국일보’를 통해 연재했던 신문 연재작이다. 그러니까 그 옛날 출간된 [두통이 만세]와는 관련이 없는 작품이지만 이서방문고에서 단행본을 찍어내면서 제목을 [두통이 만세]로 바꿔버렸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진 거다. 1970년대 자료라면 어렵긴해도 입수불가의 영역은 아니다.
ⓒ 박기준 / 소년한국일보사
아니나 다를까, 도서관에서 상당수의 연재분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말 꿈만 같던 기적.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누락된 연재분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보통 이곳 저곳의 도서관을 파헤쳐보면 대게는 보완이 되는데, 이번만큼은 방법이 없다.
그래도 어렵게 찾은 단서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아깝다. 절판된 자료를 구하는데 가장 확실한 건 출판한 회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소년한국일보사는 아직 건재하다. 전화를 걸어 과년도 스크랩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있단다. 눈물이 났다. 당장 반차를 내고 신문사로 가서 자료를 찾아봤다. 누락된 연재본이 모두 남아있었다. 드디어 없어진 퍼즐을 모두 맞췄다.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기막히게 복원해 내는 지인에게 맡겨 제본을 부탁했다. 단행본에 맞게 조판 작업과 디지털 보정을 거쳤더니 나도 깜짝 놀랄만큼 거의 완벽한 원고가 나왔다. 몇 년간 찾아 해맸던 [두통이 만세]가 내 손에 들어왔다. 멀쩡한 책의 형태로.
[두통이 만세]는 1970년대 후반의 국민학생들이 겪었던 삶을 중심으로 당시의 사회상과 가정사, 그리고 학창시절의 단면을 담아낸 수작이다. 가난하지만 모범생인 두통이와 수현이, 그리고 이들의 부모가 일하는 집의 부잣집 자녀인 준호와 영미. 준호의 똘마니 죽상이 등 다양한 군상들이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간다.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어른들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준호네 집에서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두통이 아버지가 누명을 쓰는 에피소드나 영미네 집 가정부로 일하는 수현이의 양어머니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친어머니의 갈등구조 등 매우 촘촘하게 짜여져 있는 인물관계의 묘미가 단순한 어린이용 만화답지가 않다. 그 어린나이에도 [두통이 만세]을 인상깊게 보았던 이유가 그거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만화답게 이 작품에는 요즘 아이들의 눈높이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경들이 종종 등장한다. 가령 부잣집 도련님 준호가 소풍날 가져온 통닭을 보자 죽상이가 “그거 통닭 아니냐?”며 놀라는 모습은 지금 시각에선 굉장히 생소해 보인다. 난 이런 것이 좋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버린 옛 모습들이 만화책에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 박기준 / 소년한국일보사
지나칠 정도로 선을 추구하고 눈물샘을 자극하다 못해 쥐어짜는 취루성 각본이 조금 오글거리긴 해도 [두통이 만세]는 순수의 시대였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성공의 사다리가 치워지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수저의 종류로 사회적 계급이 고착되어 버리는 세상, 아마도 [두통이 만세]가 나올 때에는 상상하지 못한 세상이었을 거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난 심정은 왠지 더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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