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람보] 코믹스 리뷰(바로가기)에서도 설명했듯이 1980년대 중후반까지 국내 만화계에서는 헐리우드 영화를 컨버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저작권 측면에서는 떳떳하지 못한 점이 있으나 작가의 재해석이 들어간 이러한 작품들은 극장을 찾아갈 형편이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하위 문화의 일부였다.
사실 이런 번안물의 특징 중 하나는 작가에 의해 원작 영화와는 다른 결말을 가지거나 작품의 분위기가 매우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이미 감상한 입장에서도 비교해서 보는 재미를 주곤 했다. 게다가 작가군이 김형배나 박동파 화백 같은 당대의 내노라 하는 실력파 만화가들이 번안활동을 하던 시기라 작품의 퀄리티에 있어서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 [나간다 용호취]로 인기를 끌던 장태산 화백도 이런 번안물 작업을 했던 작가로 유명하다. [구니즈], [그렘린], [배트맨], [애니] 등의 작품을 번안했던 그는 특유의 힘있고 굵은 필체와 함께 다소 열혈끼 충만한 스토리로 원작을 해석하곤 했다. 특히 [그렘린]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선 이 작품은 설정에 있어서 원작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장태산의 페르소나이자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의 주인공 클린트 유(유백만)다. 한국계 미국 이민자로 동네 양아치들에게 멸시받는다는 설정 또한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의 스핀오프라 할 정도로 판박이다. 이후 모과이를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그렘린]의 에피소드는 상당부분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고 있지만 결말부분은 훨씬 더 화끈하다.
영화에서는 그렘린들이 모인 극장에 가스를 틀어놓고 불을 붙여 몰살시킨 뒤에 살아남은 두목을 햇빛으로 제거하는 결말이지만 만화에서는 그렘린이 모인 곳에 가스를 틀어놓고 클린트 유가 직접 차를 몰고 돌진해 폭발시키는 하드보일드한 결말을 선택했다.
이렇듯 한국적 B급 문화의 결정체인 번안 만화들은 1980년대 말에 서서히 하향세를 타게 되는데 필자의 짧은 기억력으로는 김승룡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는 작가에 의해 출간된 [토탈리콜]을 끝으로 더 이상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최근에는 이런 번안물과는 다른 방법으로 영화의 코믹컬라이징에 접근하는 추세다. 가령 [설국열차]의 프리퀄을 윤태호 작가가 내놓은 것을 비롯, [사이코메트리]의 사이드 스토리를 그린 고영훈 작가나 [살인의뢰]의 프리퀄로 다시 돌아온 장태산 화백 등 국내 영화를 중심으로 자생적인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어쩌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긍정적인 흐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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