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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 (코믹스) - 헐리우드 영화의 코믹컬라이징을 추억하며

페니웨이™ 2014. 10.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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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극장가의 영화들을 만화로 컨버젼하는 관행이 유행처럼 번졌다. 주로 1980년대 중후반이 전성기였지만 70년대에도 [대부]가 대본소용 성인만화로 출간되거나 [스타워즈]의 코믹스판이 나오는 등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컨텐츠만 빌린 것이 아니라 작가들의 작화 실력도 꽤나 수준급이어서 단순한 흑역사로 덮어버리기엔 좀 아까운 부면이 있다.

1970년대 코믹스판으로 나온 [대부]와 [스타워즈]

1980년대에는 소년 만화지의 성장과 함께 단기 연재방식으로 많은 작가들이 영화를 원작으로 한 만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형배 작가는 [인디아나 존스] 1,2편을 그렸고 박동파 작가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5,6편을,  장태산은 [배트맨], [구니스], [그렘린] 등의 작품들을 연재해 많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극장가가 요즘처럼 어린 아이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형편은 아니었는지라, 이런 번안 만화는 영화 이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소년중앙에 연재된 박동파 화백의 [제국의 역습]

이런 만화들의 특징은 흔히 원작의 줄거리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때론 영화와는 다른 결말이나 내용을 선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빚어진 부작용 중 하나는 영화를 본 아이들과 영화를 보지 않고 만화만 본 아이들 사이에 줄거리의 혼선이 빚어져서 서로 자기가 본 게 맞다고 티격태격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필자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람보]였다. 당시 [람보 2]의 상영 등급은 R등급을 받은 외국과는 달리 연소자 관람가였기 때문에 초중딩 할 것 없이 전국민이 람보 열풍에 빠져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조조 선착순으로 주는 티셔츠를 받기 위해 밤샘을 한 청소년들의 행태가 뉴스에도 실릴 정도였다.

당시 필자는 돈이 없던 관계로 영화는 못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친구녀석이 만화가게에서 [람보] 만화책을 빌려와 탐독중인 것이 아닌가! 곁다리로 같이 만화책을 보던 중 이상한 장면이 하나 있어 친구 녀석과 티격태격했던 장면이 아직도 생각난다. 문제의 그 장면은 람보가 키우던 사슴을 차에 놓고 잠시 가게에 간 사이 동네 불량배들이 사슴을 죽이게 되는데, 사슴의 시체를 끌어안고 절규하던 람보의 대사는 다음과 같았다.

분명 그림에는 사슴의 목이 붙어 있는데, 왜 잘랐다고 하는 거지? 나는 분명 이 장면이 잘린 사슴의 목을 심의 상의 문제 때문에 다시 수정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친구 녀석은 "사슴의 목을 자른"이 아니라 "조른"의 오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별 것도 아닌 다툼이었는데,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이 녀석이 만화책을 빼앗아  가버렸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나는 그 만화책의 후반부를 보지 못했다.

나는 영화관에서 [람보 2]를 봤다는 친구들에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확인차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람보가 무슨 사슴을 키우냐고 나를 허언증 환자처럼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일로 나는 만화책의 결말도 못보고 되려 영화를 본 아이들에겐 이상한 녀석으로 손가락질 받게 되었다. 더 웃기는 건 훗날 내가 [람보 2]를 봤을 때 내가 기억하던 이 사슴 살해씬은 정말로 영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난 도대체 무엇을 봤단 말인가...

그런데 그 미스테리를 최근에야 풀었다. 어렵게 입수한 7권짜리 대본소용 [람보] 만화책. 어린 시절 결말을 보지 못했던 바로 그 작품이다. 워낙 그 사슴 장면이 강렬하게 남아있어서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흘러 책장을 넘기니 아차! 이건 [람보 2]의 코믹컬라이징이 아니라 [람보 2] 이후의 사건을 다룬 작품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만화판 [람보]는 백산 작가가 창작한 100% 오리지널 스토리였던 것이다. 사실 해외에서도 [람보 2]의 개봉 이후 코믹스 버전이 잠시 출간되긴 했었는데, 국내에서 이처럼 독자적인 스토리를 가진 만화가 나왔다는 점이 나름 신선한 충격이다.

1986년에 출간된 [람보] 포켓코믹스판

일단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이 작품은 영화 [람보 2]에서 머독에게 배신당한 람보가 본부의 최첨단 설비를 부수며 절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시다시피 영화에서 전개되는 이후의 이야기는 람보가 태국으로 가 은둔 생활을 하다 아프가니스탄의 전장으로 몸을 던진다는 내용이며 그것이 [람보 3]다.

만화판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람보가 전역을 한다.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이 [람보 2] 역시 사법거래로 용병처럼 투입된 것이어서 정규군이 아닌 람보가 전역을 한다는 게 말은 안되지만 여하튼 람보는 전역 후 미국으로 돌아온다. [람보 4: 라스트 블러드]가 나오기 무려 20여년 전에 이미 백산 작가는 람보가 미국으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인가!

고향으로 돌아온 람보는 옛날 자신의 아내를 죽인 엑스큐즈너가 보복이 두려워 자신을 제거하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악당들과의 결전을 준비하던 람보는 우연하게 자신의 딸을 만나게 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적들과의 교전에서 그만 딸이 죽고 만다. 복수를 다짐하는 람보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중동으로 출국, 테러리스트 집단의 우두머리인 엑스큐즈너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조직으로 잠입해 복수를 완수한다는 내용이다.

만화 [람보]는 말하자면 1인 부대인 람보가 테러리스트 조직을 송두리채 날려버리는 액션물로서 전쟁의 희생양인 람보의 트라우마와는 무관하게 개인사와 얽힌 복수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다. 구성이 탄탄한 편은 아니지만 언더커버로 조직에 침투해 활약을 펼치는 람보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영화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던 람보의 개인사, 특히 람보가 이미 결혼해 다 큰 딸래미까지 둔 품절남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밝혀지는 등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더 놀라운 건 이 만화가 나온 시기는 1987년인데, 아직 [람보 3]가 나오기 전에 이미 아프카니스탄을 작품 속 배경으로 설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만화가 백산은 원래 1960년대 스포츠 만화계에 한 획을 그었던 중견작가의 이름인데, [람보]를 그린 작가가 [빅토리 야구단], [태양을 향하여 달려라] 등을 내놓은 그 작가인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람보] 외에도 [록키] 만화판을 내놓으면서 명실공히 80년대 실베스터 스텔론 주연 영화의 코믹컬라이징 작업을 주로 했던 만화가임엔 분명하다.

백산 작가의 또다른 대본소용 코믹스 [록키]

[람보 2]의 영향으로 한 때 한국에는 '람보'라는 만화들이 무척 많이 나왔는데, 김영하 화백의 [짬보 람보]를 비롯해 김수철 작가의 [특수공작원 람보], 박삼 작가의 [생체 변신로보트 람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적어도 내 기억에는 오리지널 람보 캐릭터와 연관된 작품은 백산 작가의 [람보] 뿐이다.

어쨌거나 이런 작품들을 보다보면 옛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그 내막이야 어쨌든 가난했던 그 시절, 영화관을 찾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드물었던 시기에 문화적인 갈망을 해소해 주었던 나름의 돌파구였으니까 말이다.

 

*  본 리뷰에 사용된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단, 본문의 내용은 작성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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