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No.28
동구권과 소련의 함락. 냉전시대의 붕괴는 007 제임스 본드로 대표되는 스파이 영화의 시대가 종식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확실히 티모시 달튼의 [007 살인면허] 이후 007 시리즈는 한동안 공백상태에 있었고, 탈 냉전시대에 걸맞는 주인공인 잭 라이언이나 제이슨 본 같은 새로운 주인공들을 내세운 첩보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제임스 본드는 냉전시대의 특수한 국세정세에 딱히 의존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소설 속의 본드와는 달리 영화 속의 본드는 첩보원보다는 액션 히어로로 정착했고, 시대적 필요에 의해 동서진영의 대립구도를 이용했을 뿐이지 적이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악의 축으로 대변되는 소련이 없다면 그 자리를 아랍권이나 테러집단으로 대체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으니까요.
대표적인 예로 2006년작 [카지노 로얄]을 보면 악당 르쉬프의 캐릭터는 소련의 비밀요원이자 타고난 도박가인 악당 르 쉬프의 캐릭터를 테러리스트의 자금 관리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라도 영화의 완성도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지요. 사실 007 시리즈가 수십년간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제임스 본드가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적인 인물이며 그가 수행하는 임무도 첩보라기 보다는 일종의 모험담에 가깝기 때문일 겁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첩보원이 실제 냉전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충실한 캐릭터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특히나 현실적인 스파이 소설로 유명했던 존 르 카레라면 더욱더 그렇지요. 만약 그의 페르소나인 조지 스마일리가 무기밀매상이나 알카에다를 때려잡는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면 어떨까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아무리 현 상황에 맞게 캐릭터를 리모델링한들, 원작파괴를 넘어 존재가치를 부정당하는 그런 꼴은 상상만해도 끔찍하죠.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냉전시대의 잊혀진 첩보물의 스타일을 따라간건 그런 의미에서 기념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 Studio Canal, Karla Films, Paradis Films. All rights reserved.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새긴 했는데, 말이 나온김에 첩보영화의 마스터피스로 알려진 작품 하나를 살펴볼까 합니다. 마틴 리트 감독의 1965년 작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는 존 르 카레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007 시리즈 4번째 작품인 [썬더볼 작전]과 같은 해에 개봉되었습니다. 원작은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의 3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인데, 1편인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 Call for the Dead>와 2편인 <신성한 살인 A Murder of Quality>과는 달리 스마일리는 조연으로 한 발 물러나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서커스(MI6를 칭하는 은어)에서 베를린 지부를 담당하고 있는 알렉 리머스라는 인물입니다.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는 동독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 중 마지막 인물이 사살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를 계기로 리머스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책임을 추궁당하고 결국 해임됩니다. 실업자가 된 리머스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도서관 사서를 일하게 되지만 술해 취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직장동료 낸과 연인사이가 되지만 식료품점 주인을 구타에 교도소에 수감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리머스의 폐인같은 생활은 일종의 위장술로서 서커스의 수장인 컨트롤의 지시로 동독측 간부 문트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의 첫단계였습니다. 이 계획을 뒤에서 기획, 지휘하는 인물이 바로 조지 스마일리입니다. 계획대로 미끼를 문 동독측의 스파이들은 리머스에게 접근해 정보를 넘기는 댓가로 거액의 돈을 제시합니다. 이를 수락한 리머스는 문트의 수하인 피들러에게 정보를 제공해 문트가 영국측의 첩자라는 의혹을 심는데 성공합니다. 리머스의 이간계(離間計)인해 독일 내부에서 스스로 문트를 제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죠. 그러나 리머스의 변절을 의심한 문트로 인해 작전은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 Paramoun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배신과 음모가 판치는 첩보 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스파이들은 미녀와의 후끈한 데이트를 즐기거나 마티니를 홀짝거리며 카지노를 출입하는 그런 낭만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날 선 상태의 남자들로 묘사되지요. 개인보다는 조직의 필요를 우선시하고 때에 따라서는 소모품처럼 희생되는 스파이들의 상황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사실감을 전달합니다. 감독인 마틴 리트는 원작이 주는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흑백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하는데, 과연 영화의 분위기와 아주 잘 맞는 선택입니다.
물론 영화의 일등공신에는 알렉 리머스를 연기한 리처드 버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래 이 역으로 먼저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배우는 버트 랭카스터지만 결국 버튼에게 배역이 맡겨지게 되었는데요, 고독하면서도 지친 스파이의 모습을 진지하게 연기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4번째로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캣 벌룬]의 리 마빈에 밀려 수상에는 실패합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숀 코네리와는 완전히 다른 타입의 첩보원 상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지요. (사실 그는 7번이나 오스카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은 한번도 하지 못한 무관의 제왕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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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영화는 존 르 카레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첫번째 작품이자, 조지 스마일리가 등장하는 첫번째 영화이기도 합니다. 원작의 1,2편에서 추리소설 속 탐정처럼 활약했던 조지 스마일리는 이번 작품을 통해 배후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초대 조지 스마일리는 루퍼스 데이비스가 맡았으며, 이후 제임스 메이슨, 알렉 기네스, 덴 홀름 엘리엇, 게리 올드만 등의 배우들이 조지 스마일리를 연기하며 제임스 본드만큼이나 다양한 배우가 연기한 첩보원 캐릭터가 됩니다. 사실 원작에서의 조지 스마일리가 키작고 안경낀 '두꺼비'형 외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 걸 보면 가장 유명한 알렉 기네스나 게리 올드만 보다는 루퍼스 데이비스나 덴 홀름 엘리엇 같은 배우가 원작에 더 근접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Paramoun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요즘 젊은 세대가 보기엔 당시의 상황이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한 세대 이전의 분들이라면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는 굉장히 현실감 있게 와닿는 영화일 겁니다. 특히나 액션이 거의 전무한 작품임에도 영화의 백미를 이루는 마지막의 법정 공방은 지금 보더라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서스펜스가 느껴지지요. 그리고 그 결말의 공허함까지 무척이나 세련미가 느껴지는 영화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P.S
1.쓰고 나니 [스마일리의 사람들] 영화판을 빨리 보고 싶군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배우, 스텝 그대로 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뭐 소설상으로는 카를라 삼부작 중 <써커스에서 온 스파이 The Honourable Schoolboy>가 끼어 있습니다만 이건 조지 스마일리가 주연이 아니라 [스마일리의 사람들]로 바로 넘어가 2부작 구조가 될 듯 하군요. 아님 <은밀한 순례자 The Secret Pilgrim>까지 영화화되어서 3부작이 되거나.
2.사실 한석규 주연의 [이중간첩]이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와 비슷한 스탠스를 취한 영화이긴 합니다. 남북한 대치상황이라는 현실적인 어드벤티지를 고려해보면 꽤나 걸작이 될 소지가 충분한데, 뭔가 한방이 부족하긴 했죠. 그냥 존 르 카레의 원작을 사와서 리메이크했으면 어땠을까요? (전에 누군가가 비슷한 의견을 주신걸 보면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닐텐데요)
3.리처드 버튼은 특유의 의리심을 발휘해 이번 작품에서도 연극배우 생활 당시 절친했던 동료들을 대거 기용하도록 앞장섰는데, 대표적인 배우로 원작에서 10대로 설정된 낸 역에 30대에 접어든 클레어 블룸을 적극 추천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두 사람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지요.
4.리처드 버튼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식료품점 주인의 정체는 MI6의 수장입니다.....는 훼이크고 당시 007 시리즈에서 M국장 역을 맡았던 버나드 리가 이 역할을 맡았지요. 제법 큰 프렌차이즈의 고정 멤버가 이렇게 작은 역할로 출연한 것도 흥미롭지만 결정적으로 이언 플레밍과 존 르 카레의 세계관 모두에 발을 담근 배우라는 점에서도 흥미를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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