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때의 기억이다. 그러니까... 대략 국민학교 1,2학년 때 즈음.. 워낙 허풍과 과장과 상상력이 결합된 시기이니만큼 당대 사내아이들에게 최고의 화두였던 로봇에 대해서도 수많은 허언들이 오고 갔다. 이를테면 미국의 한 박물관에는 그레이트 마징가가 있다느니 그 옆에 그렌다이저가 서 있다느니 하는 말들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허풍들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말도 안되는 헛소리이긴 해도 그 근거가 전무했던건 아니라는 얘기다. 우선 나가이 고의 코믹스판 [그렌다이저]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레이트 마징가가 베가성의 친위대장 바렌도스에게 탈취당하는 내용을 담았다. 과학요새연구소에 있을 그레이트를 어떻게 탈취했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레이트 마징가가 로봇 전시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한국 어린이들이 나가이 고의 [그렌다이저] 코믹스를 직접 접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적다. [그렌다이저] 마지막 에피소드의 클라이막스는 대단히 참혹하며 엽기적인데, 가령 듀크프리드의 모성에서 바렌도스가 인질로 잡은 아이들을 하늘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이른바 '인간 소나기'의 만행을 저지르는 회상씬이 등장한다.
더 나아가 이 에피소드의 후반부에서는 지구에서 듀크프리드와 재회를 하게 된 바렌도스가 그레이트 마징가를 탈취해 그렌다이저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과학연구소의 식구들과 아이들을 마징가의 본체에 굴비처럼 엮어놓아 그렌다이저의 몸이 마징가에 닿기만해도 묶인 아이들이 처참하게 터져서 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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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에 다양한 [그렌다이저] 모작들과 해적판이 국내에 유통되기는 했지만 이런 잔인한 묘사를 담은 원작이 버젓이 돌아다녔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가진 또 하나의 작품이 있었다. 바로 안제일 작가의 [로보트 태권브이 대 썬더A]다.
이미 [로보트 태권브이 대 타이자]로 태권브이와 그렌다이저의 크로스오버를 성사시킨 안제일 작가는 이번엔 김청기 감독의 또 다른 작품 [혹성 로보트 썬더A]와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한다. 이 작품 역시 '세계로보트전시회'로 시작된다. 원작인 [그렌다이저]에서 로봇전시장의 풍경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로보트 태권브이 대 썬더A]에서는 그야말로 로봇 마니아들의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다.
'대한민국 로보트 연구학회'가 추죄한 세계로보트전시회에는 세계 각국의 기라성같은 로봇들이 즐비하다. '기동전사 건담'을 비롯, '투장 다이모스', '황금전사 골드라이터',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 '달타니어스', '철인28호' 등 마치 슈퍼로봇대전의 한장면을 연상시킨다. 물론 여기에 우리의 '로보트 태권브이'가 빠질 수 없다. 게다가 이 세계적인 전시회장을 둘러보는 까메오는 [별나라 삼총사]의 주인공 호세, 땅딸이, 꺽다리다. (안제일 작가는 [별나라 삼총사]의 코믹스판을 그렸다)
UFO군단의 악당 카르말 대령은 지구 최강의 태권브이를 훔쳐서 그렌다이저를 제거하고 지구를 정복하려 한다. 탈취당한 태권브이와 이를 쫓아가다가 납치당한 훈이 일행을 돕기 위해 출격하는건 놀랍게도 그렌다이저다. 여기서 잠깐, 왜 그렌다이저는 전시장에 없었느냐고? 그건 그렌다이저가 '외계에서 온 로봇'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원반수의 자폭공격으로 이내 그렌다이저는 큰 부상을 입고 추락한다.
악당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태권브이는 도심에 나타나 난동을 부린다. 전시장에 있던 그 많던 로봇들은 전혀 도움이 안된다. 애초에 외계에서 온 원반수를 상대할 수 있는건 그렌다이저 뿐이라나... 역시 태권브이가 지구 최강인건 맞긴 맞나보다. 그런데 카르말 대령이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지구에는 태권브이만 있는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미 외계로의 미션도 성공리에 완수한 혹성로보트 썬더A의 존재를 말이다.
기고만장해진 카르말은 태권브이에 훈이와 깡통로보트를 메단 채 인질극을 펼친다. 이는 나가이 고 판 [그렌다이저]에서 연구소 사람들을 굴비처럼 잔뜩 엮어서 엽기적인 위협을 가하던 원작을 한국식으로 순화시킨 연출인데, 어쨌거나 이런 위기 속에서 썬더A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기껏 대활약을 기대했던 썬더A가 맥을 못추니 반격의 기회를 제공하는건 작품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인질까지 된 훈이와 깡통로보트다.
원래 태권도의 고수의 훈이와 고추가루탄으로 중무장한 깡통로보트의 활약으로 인해 태권브이의 탈환에 성공하고, 이제 남은건 카르말 대령에 대한 응징 뿐. 때마침 나타난 그렌다이저의 듀크프리드에게 카르말 대령이 저지른 '인간 소나기' 사건에 대한 복수를 종용하지만 더블하켄으로 바렌도스를 시원하게 두 동강을 내버리는 나가이 고의 원작과는 달리 안제일 버전의 듀크프리드는 차마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카르말 대령을 단죄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UFO군단의 지구 책임자 간달 사령관이다.
이 작품에서 나가이 고의 [그렌다이저] 에피소드를 차용한 흔적은 너무나도 명백하지만 훗날 안제일 작가의 변에 의하면 자신은 출판사 측에서 넘겨준 대본대로 작업을 했을 뿐 나가이 고의 원작과 이렇게도 흡사할 줄은 몰랐다고 하니, 당시 한국 만화계의 관행을 짐작해보면 가히 틀린말도 아닌 듯 하다.
어쨌거나 한국의 '이케가미 료이치' 안제일 작가의 [로보트 태권브이 대 썬더A]는 로봇만화에 대한 사내아이들의 극대화된 욕망을 충족시키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한국과 일본의 무수한 로봇들을 한 작품에서 보는 즐거움과 태권브이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렌다이저의 눈물겨운 노력은 관행적 표절행태가 묵인되는 시절의 작품이 아니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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