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열전(續篇列傳) 번외편
흔히 세계 3대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불리는 작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 그리고 앨러리 퀸의 [Y의 비극]입니다. 누가, 언제부터 세계 3대 미스터리 소설을 규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유년기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마니아였던 제가 정말 재미있는 추리소설로 기억하는게 이 세 작품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이 미스터리 소설의 걸작 가운데서도 꼭 한 작품만 택하라면 전 주저없이 [Y의 비극]을 꼽을 겁니다. 제가 이 작품을 가장 처음 접했던게 초등학교 4학년때 즈음, CA활동시간에 독서반에서 우연히 읽게된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실 범행의 트릭이나 범인의 정체 등을 고려할때 그 어린나이에 보기엔 다소 정서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임에도 저항감없이 접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소년문고로 어느 정도 삭제를 거친 (지금은 절판된) 계림문고판을 접했기 때문이었죠. 이 계림문고판에 대해서는 이따가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잠시 소개하자면,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뉴욕입니다. 대부호인 해터가의 주인인 요크 해터의 변사체가 바다에 떠오르면서 비극의 서막이 시작되지요. 해터가의 실세는 안주인인 에밀리 해터라는 드센 여인인데, 그녀와 요크 해터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광기를 지닌 인물들입니다. 세간 사람들은 이를 두고 '미치광이 해터집안'이라고 부르며 가쉽거리로 삼을 정도이지요.
아무튼 자살로 추정되는 요크 해터의 변사체 발견 이후 어느날 해터 자택에서 독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뒤이어 만돌린을 사용한 살인과 방화 등 의문의 연쇄사건이 해터집안을 공포에 몰아넣게 됩니다. 이에 경찰에서는 은퇴한 명배우이자 [X의 비극]에서의 '롱스트리트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드루리 레인에게 본 사건의 수사를 의뢰합니다.
이쯤되면 왜 이 작품을 속편열전에 소개하게 되었는지 눈치채셨을 겁니다. 이 작품은 본디 엘러리 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던 프레더릭 다네이와 맨프레드 리가 버나비 로스라는 또다른 필명으로 발표한 이른바 'XYZ 4부작'의 두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물론 트릭과 기교면에서 평단의 극찬을 받은 [X의 비극]이 재미있는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엘러리 퀸의 초기 ‘국명(國名) 시리즈’와 비슷하게 탐정의 화려한 추리방식에 초점을 둔 반면, [Y의 비극]은 작품의 분위기나 성격이 전편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Y의 비극]을 돋보이는 수작이자 속편으로 만들어 주고 있죠.
주인공인 드루리 레인은 전설적인 연극배우 출신으로 이젠 귀가 멀어 은퇴한 상태이지만 독순술을 통해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로서 과거 수없이 많은 범죄자를 연기하기 위해 체득된 범죄심리를 활용해 수사에 협조하는 ‘비공식적인’ 탐정입니다. 다소 명쾌한 방식으로 [X의 비극]을 해결했던 것과는 달리 [Y의 비극]에서는 비극적인 탐정이 되고 말지요.
그는 스스로가 이번 사건을 ‘실패한 케이스’로 규정하는데, 스포일러상 더 많은 점을 언급할 순 없지만 레인이 사건의 전모를 알아낸 유일한 사람으로서 연쇄 사건의 선제적 예방이 가능한 타이밍을 놓치는 우를 범한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사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또한 죽을 사람은 다 죽고 나서야 사건의 전모를 느릿느릿 밝히는 소위 뒷북형 탐정입니다만 이러한 추리방식을 은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있는 긴다이치와는 달리 드루리 레인은 이 점에 대해 엄청난 자책감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그만큼 본 작품은 윤리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계림문고판은 사건의 중요한 복선이 되고 있는 해터가의 병리학적인 내력 문제(사실 소년문고에 구체적인 병명을 기재하긴 좀 곤란한 측면이 있었죠)나 후반부에서 용의선상에 떠오르는 에드거 페리에 관한 부분은 완전히 삭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나중에 커서 다른 판본을 통해서야 비로서 알 수 있었지요. (사실 이 계림문고판의 문제 중 하나는 엄청난 삭제외에도 목차에 범인 스포일링을... -_-)
국내에 소개된 [Y의 비극]의 판본은 계림문고 외에도 해문출판사(물론 팬더추리걸작선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동서문화사, 국일미디어(표지에 범인 스포일링의 만행을 저지른...-_-), 일신사, 시공사 등에서 나왔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출간된 검은숲의 완역판이 가장 무난한 판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책의 외관이 무척 빈티지스런 느낌을 주는데 누런색 하드커버에 종이는 테두리가 세월에 의해 자연스럽게 바랜듯한 고서(古書)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줍니다.
한편 버나비 로스의 이름으로 발표된 XYZ 4부작은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으로 마무리 되는데, 어떤 면으로는 엘러리 퀸 시리즈 보다 훨씬 더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닌 시리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4편의 작품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그 원인은 [최후의 사건]의 판권문제 때문이었는데, 다네이와 리가 창간한 ‘미스터리 리그’에 [최후의 사건]을 개제하면서 이 소설의 단행본 판권을 가진 출판사와 불화를 빚게 된 것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버나비 로스의 이름은 그렇게 사라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Y의 비극]은 범인의 정체가 대단히 충격적이라는 점에서도 놀랍지만 사건의 트릭이나 범행도구의 기묘함, 동기, 사회적, 윤리적, 범죄학적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무척 많은 작품입니다. 한 마디로 천재적인 발상에 의해 탄생한 걸작 미스터리 소설이랄까요. 흔히 셜록 홈즈의 아버지 코넌 도일이나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존재 때문인지 미스터리 소설하면 영국을 떠올립니다만 엘러리 퀸이나 윌리엄 아이리시, 레이몬드 챈들러, S.S 반 다인 등 추리소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미국 미스터리 작가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싶군요. 이제 슬슬 서스펜스를 안겨줄 본격 미스터리 소설을 하나 둘 찾아봐야 할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P.S
1. 네이버 등을 통해 Y의 비극이란 검색어를 절대 입력하지 마시길 권합니다. 범인의 이름을 밝히는 자동검색어가 뜨더군요 -_-;;; 이 작품은 정말 범인을 미리 알면 안되는 작품입니다. 참고로 본문에 언급한 것 외에도 해문출판사의 [세계의 명탐정 44인] 이 책에서도 스포일링을 하고 있답니다. 뭐... 이 책 자체가 한 권의 거대한 스포일러 백서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2. 혹시라도 계림문고판 (계림닷컴판이 아닙니다) 가지고 계신분은 연락주세요. 후사하겠습니다.
3. 사건의 배경이 주로 해터가 내부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연극적인 요소가 굉장히 강합니다만 아직까지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게 조금 의외입니다. 대신 한국에서는 1994년에 SBS에서 2부작 드라마로 번안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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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항간에는 반 다인의 [그린살인사건]이 [Y의 비극]에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던데, 두 소설사이에 ‘홈 머더 Home Murder’라는 서브장르의 공통분모를 빼고 나면 이런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라이벌과 다름없던 반 다인의 대표작을 엘러리 퀸이 베꼈을리가…
* [Y의 비극] 구입처 : http://www.yes24.com/24/goods/8903276?scode=032&OzSrank=1
Y의 비극 -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검은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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