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소설 ‘장발장’은 어렸을 때 꼭 읽어야 할 필독 도서 중 하나였습니다. 배고픈 장발장이 어쩌다 빵을 훔치게 되고 그 대가로 19년의 혹독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 풀려나 어느 성당에서 후한 대접을 받지만 은으로 된 식기들을 훔쳐 달아나다가 다시 경찰에게 걸려 성당의 주교에게 끌려가 자초지종을 확인받으려 할 때 주교의 따뜻한 용서로 새사람이 된다는…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
아마 모르긴 해도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단순히 어렸을적 아동용으로 각색된 문고판만 읽었던 사람에게 ‘장발장’은 그리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장발장’ 하면 은촛대와 용서의 미덕이 전부인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장발장의 원작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기를 기점으로 한 일종의 대하 서사극의 형태를 띄고 있는 작품입니다. 스케일도 방대하거니와 작품이 품고있는 사회적 메시지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깊이가 있다는 얘기죠.
개인적으로 이번에 개봉된 [레 미제라블]을 보면서 느꼈던 건 이 작품이 이렇게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혀질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셰계 4대 뮤지컬 (사실 이 수식어는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중 하나라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맘마미아]를 제치고 뮤지컬 부문 한국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건 휴 잭맨이나 앤 해서웨이 같은 스타 캐스팅의 위력뿐만이 아니라 뭔가 관객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낼만한 그 무언가가 이 작품속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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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에 삽입된 노래들은 분명 뛰어나지만 따지고 보면 [오페라의 유령]이나 [맘마미아]의 노래들도 만만치 않은 명곡들 아닙니까? 원작의 내용이 워낙 훌륭하긴 해도 [레 미제라블]의 구성은 사건과 사건의 이음새가 매끄럽지 않은 구성이어서 영화적인 스토리 텔링에 익숙한 한국관객에게 그리 친절하게 느껴질만한 작품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적인 재미와 스타들의 향연을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의 정서적인 공감대를 함유한 작품이라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레 미제라블]에 힘이 실리는 부분은 중반부 청년들의 혁명이 시작되는 바리케이트씬 부터입니다. 굳이 빅토르 위고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실패한 봉기를 소재로 삼고 있는 건 의미심장합니다. 대중들에게 철저히 외면받고 오직 혁명에 참여했던 청년들만 희생당하는 이 사건은 누군가에겐 바로 얼마전 벌어진 국가적 빅이벤트를 상기시켰을 것이며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하며 치유받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인 영화라고 느꼈을 겁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미디어에서 ‘레 미제라블’을 다루어 왔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와닿게 원작을 부각시킨 작품은 이번 톰 후퍼의 [레 미제라블]이 처음입니다. 더군다나 개봉 타이밍이 절묘했던 덕택에 이 영화는 본의아니게 한국의 젊은 관객들에겐 정치적 힐링무비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 저런 골치아픈 접근법으로 [레 미제라블]의 재미를 설명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한편의 공연입니다. 무대위의 갑갑한 시각적 한계를 벗어나 영화가 취할 수 있는 비주얼적인 장점을 가져다 놓았고 스타들이 관객과 호흡하며 실시간으로 부르는 노래의 향연은 눈과 귀를 모두 황홀경에 빠뜨립니다. 특히 앤 해서웨이의 ‘I Dreamed a Dream’은 정말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만큼 환상적입니다.
더군다나 그동안 ‘장발장’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관객에게는 원작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상기시켜주는데 충분한 가교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뮤지컬의 요소상 사건들 사이의 연결이 영화나 소설처럼 친절한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구분된 진행방식 상 어느정도의 불친절한 전개는 감수해야만 합니다. 영화를 보기 이전에 빅토르 위고의 오리지널을 먼저 읽는다면 더 없이 완벽한 감상이 되겠지만요.
P.S:
1. 논란이 되었던 러셀 크로우의 캐스팅에 대해 별 불만은 없었습니다. 뮤지컬에 썩 어울리는 배우는 아니지만 단순하고 우직한 자베르 경관의 캐릭터를 표현하기엔 제격인 배우더군요.
2. 편집된 ‘장발장’만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영화가 될 겁니다. 은촛대 얘기는 영화 10분만에 끝나니까요.
3. 앤 해서웨이는 정말 다재다능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르의 제약이나 캐릭터에 구애받지 않고 이렇게 딱 맞는 배역을 찾아다닌다는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4. 휴 잭맨… 많이 늙었더군요. 울버린은 이제 어쩔… (울버린은 불노불사 캐릭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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