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더운 여름날, 잠시 더위를 식히려고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냉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좌석의 누군가가 다가와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의 싸대기를 후려칩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이 각박합니다. 무섭고, 잔인하고, 사납습니다. 멀쩡히 길을 가다가도 뒷모습이 도망간 마누라와 닮았다는 이유로 칼맞아 죽는 세상입니다.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을 지적받자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폭언과 폭력적인 제스처로 위협을 가하는 세상입니다. 잘못을 한 사람이 더 큰소리치고 모든걸 힘의 논리로 풀어내려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분노에 가득 차있고 이를 표출할 방법을 찾지못해 초조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다수의 정의가 더는 먹혀들지 않을때 세상은 결국 나쁘게 변질되고 말지요.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좋은 세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의 이상향을 바라는 감독의 마음이 담긴 작품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평범한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뛰어난 건 어설픈 이상주의를 관객에게 강요하기 보다는 관객 스스로가 문제점에 대해 자문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 Danmarks Radio (DR), Det Danske Filminstitut, Film Fyn. All rights reserved.
영화가 제시하는 화두는 크게 '용서'의 미덕과 '복수'의 당위성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러나 이게 우리가 관성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정말로 피부로 와닿고 선뜻 실행하기 힘든 형태로서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을 쿡쿡 찌릅니다.
[인 어 베러 월드]에서 대칭점에 선 두 사람을 묘사하는 방식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의사인 안톤은 아내와는 별거중이고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데도, 저 멀리 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 인물이지요.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기꺼이 대는 그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한 남자에게 이유도 없이 싸대기를 얻어맞아도 '그럴 가치가 없다'며 이에 반격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이런 행동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겁쟁이로 보일 뿐이지요.
반면 크리스티안은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동네로 이사온 아이입니다. 안톤의 아들 엘리아스가 왕따를 당하고 있을때 그는 무자비한 폭력을 불사하며 엘리아스를 구해냅니다. 그러나 그런 크리스티안의 행동은 순수한 정의감에서 나온것이라기 보다는 분노의 표출이라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안톤이 이유없는 폭력에도 대항하지 않는 것을 본 크리스티안은 엘리아스에게 우리가 대신 복수를 하자고 부채질합니다. '초반에 강하게 제압하면 다음에는 누구도 날 건드리지 않는다' 이것이 크리스티안이 가진 가치관입니다.
ⓒ Danmarks Radio (DR), Det Danske Filminstitut, Film Fyn. All rights reserved.
일반적인 '착한 영화'의 관점에서라면 [인 어 베러 월드]는 안톤의 가치관에 맞춰 영화를 전개해 나가겠지요.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전개되면 될수록 관객들은 복수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안톤의 행동에 답답합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그가 자신을 때렸던 남자를 다시 찾아가 또 다시 뺨을 얻어맞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루지요. 그가 반격을 안한다고 해서 뺨을 때린 그 남자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개과천선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관객 모두가 잘 알고 있게 때문입니다.
오히려 관객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즉각적인 보복을 당연하게 여기는 크리스티안의 행동에 공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겁니다. 과연 용서가 악을 이길 수 있는 미덕인 것일까. 비폭력이 옳은 방식일 걸까.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정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수많은 담론들이 머릿속을 파고 듭니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이렇듯 답을 내기가 두렵기에 외면하려 했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각자가 고민해볼 수 있는 여운을 남깁니다. 복수의 악순환과 증오만으로는 근원적인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색다른 차원에서 무겁게 접근했다고 할까요. 영화를 보고나니 이거 하나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용서를 하는 것은 복수를 하는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만한 용기가 과연 내게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만큼 복수의 긍정적 효과를 무시한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라는 뜻이기도 할겁니다.
P.S:
1.서두의 예는 자주가는 한 사이트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을 보고 쓴 것입니다. 어떤 분이 지인과 편의점 테이블에서 술한잔 하다가 옆 테이블 남자에게 영문도 없이 구타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가해자는 즉각 택시를 타고 도망치고, 그 남자와 같이 있었던 여자는 한사코 가해자를 모른다며 발뺌하는 상황이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글을 올렸더랬습니다. 사실 저도 비슷한 일을 겪을 뻔 했습니다. 편의점 앞에서 아버지 지인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웬 젊은 놈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야! 이리와 봐' 하더군요. 머리뚜껑이 열릴뻔한 순간이었습니다 -_-;;
2.아이들의 연기가 좋습니다. 특히 크리스티안 역을 맡은 윌리엄 욘크 닐슨은 왜소하고 모범생같은 이미지의 소년인데도, 비뚤어진 증오심에 얼룩진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더군요. 아이의 모습에서 이토록 차디 찬 카리스마를 발견하기가 쉬운일은 아니죠.
3.본문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절대악'의 용서라는 또 다른 차원의 화두가 던져 집니다. 이 부분은 정말 어렵더군요. 그래서 영화상에서도 '그렇게' 처리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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