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108
어느 배우에게나 시작은 있습니다. 데뷔작을 통해 각광받기 시작해 꾸준한 성장으로 마침내 연기생활의 정점을 찍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데뷔작은 찬란했으나 갈수록 퇴물로 전락해가는 배우들도 있죠. 반면 데뷔작은 초라했지만 나날이 성장해 슈퍼스타가 되는 배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배우의 데뷔작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오늘 소개할 영화 [뉴욕의 헤라클레스]는 다름아닌 [터미네이터]의 액션스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데뷔작입니다. 사실 영화정보 데이터베이스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아놀드의 데뷔작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았었는데,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에는 [뉴욕의 헤라클레스]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공식적인 데뷔작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네이버 영화'같은 일부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아놀드의 데뷔작을 1975년작 [청춘의 선택]으로 기재하는 등 무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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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잘 아시다시피 보디빌더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미스터 유니버스에 5회, 미스터 올림피아에 7회나 정상에 올랐던 보디빌더의 전설이었지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민자인 아놀드가 보디빌더 외에 이룬 일은 그외에도 많습니다. 그는 위스콘신대학교에서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했고, 책을 저술한 인텔리인데다 부동산 관련업을 시작해 꽤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지금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정치인으로서의 변신에도 성공했습니다.
허나 그의 커리어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건 바로 영화배우로서의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아닐까 합니다.(물론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요) 하지만 연기경험도 없고 얼굴이 잘생긴것도 아니며, 게다가 미국식 액센트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발음의 소유자인 그를 애당초 누가 영화에 출연시키려고 하겠습니까? 여기에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아놀드가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보디빌더 출신의 조 와이더였습니다. 와이더는 전성기를 기량을 보여주던 아놀드의 '몸'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할 계기를 제공하게 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뉴욕의 헤라클레스]였던 것이지요.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후견인으로 그가 영화계에 입문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던 조 와이더(왼쪽)와 아놀드.
이 작품에서 타이틀롤인 헤라클레스 역을 두고 아놀드는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보디빌더 출신의 렉 파크와 경합을 벌이게 되었는데요, 렉 파크는 이전에 3편의 헤라클레스 영화(Hercules and the Conquest of Atlantis (1961), Hercules in the Center of the Earth (1961) & La sfida dei giganti (1965))에 출연한 바 있던 배테랑이었지요. 당시 아놀드의 에이전트는 이 배역을 따내기 위해 아놀드에게 다년간의 무대경험이 있다는 감언이설로 제작진을 구슬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는 100% 구라였는데,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무대경험이란 보디빌딩 무대에 선 것이 전부였거든요. 뭐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국 이 역할은 아놀드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뉴욕의 헤라클레스]의 주연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동료 보디빌더이자 친구인 렉 파크와 아놀드.
사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에서 헤라클레스를 다루었습니다만 [뉴욕의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를 다룬 판타지가 아니라 다분히 슬랩스틱 코미디에 장르적 베이스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독특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코미디의 중심에는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있지요. 이후 아놀드가 다시 코미디 장르로 복귀한 건 거의 19년이 지난 [트윈즈]였으니 그만큼 아놀드의 코믹연기를 접한다는게 당시로선 대단히 진귀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과연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데뷔작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영화는 올림푸스에 서식하는 그리스 신들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신들의 세계에서 지루해하던 헤라클레스가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자꾸 인간계로 보내달라며 투정을 부리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쫓겨나게 되지요. 뉴욕에 오게 된 헤라클라스는 사고뭉치로 돌변하는데 원래 성격이 그런건지, 아니면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외모에 맞게 캐릭터를 바꾼건지는 몰라도 영화상에서 헤라클레스는 힘만 쎈 바보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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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에게 쫓겨나 하늘에서 떨어져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선원들이 뱃일을 시킨다는 이유로 때려 눕히질 않나, 택시비를 내라는 기사에게 배째라고 택시를 뒤집어 엎질 않나 암튼 완전 망나니죠. 그러던 어느날 빵장수를 만나 친구가 되고, 또 애인도 사귀고, 그러다가 레슬링 선수로 데뷔해 크게 성공을 거두는 등 전혀 개연성없는 플롯으로 전개되다가 제우스가 고용한 해결사 네메시스의 음모로 인해 힘을 잃게 된 헤라클레스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게되고 '제우스 당신이 킹왕짱이요' 하며 다시 올림푸스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뉴욕의 헤라클레스]의 시작부터 아놀드는 굴욕을 당하는데요, 오프닝 크래딧에 그의 이름이 'Arnold Schwarzenegger'가 아니라 '아놀드 스트롱 Arnold Strong'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는 슈왈제네거라는 성이 너무 길고 발음하기도 힘들어서 할 수 없이 바꾼 것이었는데, 흥미로운건 빵장수 프릿지 역의 배우 이름이 아놀드 스탱 Arnold Stang 이라 지금까지도 둘 중에 누가 아놀드 슈왈제네거인지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물론 영화가 완전 망한 다음에는 두 번다시 아놀드 스트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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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굴욕은 바로 더빙이었습니다. 당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심한 오스트리아식 억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도저히 그냥 쓸 수 없다고 판단한 제작진에 의해 그의 목소리 전부를 다른 성우로 교체해 재더빙해서 개봉하게 됩니다. 간간히 나오는 아놀드의 대사는 뭐 대충 거의 이렇습니다. '헤라클레스는 돈 필요없어' , '헤라클레스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아', '헤라클레스는 지지 않아' 등등... 어쨌든 아놀드의 원래 음성이 들어있는 오리지널 판본은 먼 훗날 DVD가 발매되고 나서야 원래대로 복원되었지요. 그럼에도 이 복원판에는 결정적인 에러가 남아 있는데 마지막에 라디오를 통해 프릿지에게 안부를 전하는 헤라클레스의 독백 부분은 아놀드의 음성이 아닌 성우의 음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뉴욕의 헤라클레스]는 작품 자체가 워낙 괴작스럽습니다. 영화는 줄곧 스토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오로지 아놀드의 몸을 탐하는(-_-)데에만 노골적으로 관심을 둡니다. 가령 이런 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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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렇게 망작이 되어 버린 데뷔작 덕분에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10년이 지나도록 영화계에서 아주 작은 역할로만 만족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그는 다른 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는데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자신의 특징이자 단점이 되어 버린 외모와 발음의 문제는 존 밀리어스의 역작 [코난]과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에서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되면서 단숨에 액션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지요. 그런걸 보면 어떤 작품에서 어떤 캐릭터를 만나느냐가 배우에게는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P.S:
1.본문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다시 코미디로 복귀한건 1988년작 [트윈스]를 통해서였으니까 무려 19년만의 일이네요. [뉴욕의 헤라클레스]로 생긴 코미디 장르에 대한 아놀드의 트라우마를 알만하군요.
2.좀 특이한 점은 이 영화를 아주 오래전 국내에서도 공중파로 방영한 적이 있다는 것이고(네, 당시 성우는 아놀드의 전담성우인 이정구씨였죠), 제 기억 속에는 아주 재밌게 영화를 봤다는 기억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괴작을 즐겼던 걸까요? 지금 몇십년만에 다시 보니 참.. 영화가.. 괴악스럽네요.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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