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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특집] 제임스 카메론, B급에서 영화계의 제왕까지

페니웨이™ 2009. 12. 1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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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고정꼭지인 '괴작열전'을 애독하는 독자라면 영화라는 것이 반드시 거대자본을 투입하거나 유명배우를 쓴다고 해서 걸작이 탄생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장인정신이 발휘되는 영화는 충분한 여건이 갖춰진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보다는 모자란 듯 적당히 감독의 재능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B급 영화에서 종종 탄생하곤 한다. 이제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을 과연 어떤 범주-예술지향적이냐, 흥행지향적이냐 하는-에 넣어야 할지 애매모호하게 생각할 수 밖에 이유는 어쩌면 그의 출신성분에서 출발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제임스 카메론을 떠올리는데 있어서 [타이타닉]이나 [터미네이터 2] 등의 블록버스터급 작품들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원래 그는 철저한 B급세계의 인물이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번 리뷰에서만큼은 B급 영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여기서 말하는 B급이란 그저 돈 적게 들이고 작품도 대충 만드는 그런 저질 영화들을 일컫는 의미가 아니다.

진정한 B급 영화의 조건을 갖춘 영화란 첫째, 철저한 재미위주의 영화, 둘째, 적은 예산과 짧은 기간안에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영화, 셋째, 자본의 힘이 아닌 아이디어와 근성으로 승부하는 영화를 가리킨다. 이러한 B급 영화의 논리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이 바로 미국의 전설적인 제작자 로저 코만이었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코만의 영화사 '뉴월드 픽쳐스'의 작품들은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로저 코만 사진 ⓒ Time Out Group Ltd. All rights reserved.


제임스 카메론이 그런 로저 코만의 휘하에서 3년간 영화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는 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그는 이른 나이에 '천재'의 호칭을 들어가며 비교적 수월하게 메이저 영화계로 편입된 스티븐 스필버그와는 태생부터 다른 인물이었다. 카메론은 어떤 장면을 연출하는 필요한 비용이 얼마인지를 제작사에 요구하는 것보다 주어진 예산에 맞춰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터미네이터]의 무지막지한 흥행력과 당시 기준으로 꽤나 잘 빠진 특수효과 등으로 인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쉽게 간과한 것 중 하나는 [터미네이터]가 전형적인 B급 영화의 결정체라는 사실이다. 엄밀히 따져서 [터미네이터]는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메이저 스튜디오가 넉넉한 자본을 대거나 A급 스탭이 대거 참여한 작품이 아니다. 이 영화는 프로덕션 디자인에서 특수효과까지 카메론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감독 위주의 저예산 영화였다. 최근 2억 달러짜리 대형 프로젝트인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 놓친건 바로 이러한 정신이다. '저예산으로도 재미있게'. 기본적으로 카메론의 영화는 이러한 모토에 바탕을 두고 있다.


ⓒ The Halcyon Company/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같은 2억 달러짜리 영화지만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과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의 비주얼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동일한 예산을 가지고 얼마나 영화를 효율적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럴일은 없겠지만) 카메론이 [터미네이터 4]의 연출을 맡았다면 그 2억 달러를 가지고 3억 달러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비록 [어비스]나 [터미네이터 2]에 이르러 카메론의 작품들에 쓰인 제작비가 사상 최고치를 갱신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이러한 제작비의 규모 자체가 카메론이 방만한 태도로 돈을 물쓰듯 하면서 작품의 질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변절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는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제작비의 몇배가 되는 효과를 낼줄 아는 장인이었다.

[어비스]의 흥행실패에도 불구하고 카메론이 [터미네이터 2]에서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실패에 위축되어 전편의 명성에 기대는 치사한 감독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혹자는 [터미네이터 2]가 나왔을 때 구태의연한 재탕의 우를 범해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스스로 망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었지만 이런 걱정은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무시한 기우에 불과했다. 그 두가지 중 하나는 제임스 카메론이 'King of the Sequel (속편의 제왕)'이라는 점이었으며, 또 하나는 그가 뼛속까지 B급 장인정신을 지닌 근성의 사나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제임스 카메론은 (비록 참담한 결과물이 나오긴 했지만) [피라냐 2]로 장편 극영화의 데뷔를 마쳤고, [에이리언 2]에서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편과 완전히 다른 속편으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살리면서도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더군다나 그는 [람보 2]의 각본도 담당했었다. 이쯤되면 속편의 룰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정통한 사람이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본다.

ⓒ Austin Roesberg. All rights reserved.


예상대로 카메론은 [터미네이터 2]를 전편의 클리셰에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2'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고 해서 전편의 명성에 의존하는 작품이 되는 것을 누구보다도 카메론 그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터미네이터 2]가 가진 비주얼에 압도되거나, 혹은 이 영화가 지닌 오락적 요소와 액션이라는 장르적 선입견 때문에 이 작품을 단순한 상업영화 정도로 폄하할런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감독의 작가정신이 녹아있는 몇 안되는 상업영화다.

자, 이쯤해서 제임스 카메론의 작가주의적 특징이란 무엇인지 잠시 언급해 보도록 하자. 제임스 카메론을 놓고 작가주의 운운하는 것이 혹자에게는 우스운 일처럼 여겨질런지도 모른다. 분명 카메론은 예술영화나 줄창 찍어대는 빔 벤더스나 컬트계의 거장 데이빗 린치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감독이긴 하나, 적어도 작품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서두에서 카메론을 예술지향적이냐, 흥행지향적이냐 하는 범주로 구분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한 또다른 이유 중 하나다. (사실, [타이타닉]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가져갈 만큼의 영화냐고 누가 묻는다면 여전히 필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성향에서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디스토피아적인 SF다. 카메론이 일찍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스타워즈]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트루 라이즈]나 [타이타닉] 같은 작품을 제외한 [에이리언 2], [터미네이터 1,2], [어비스] 그리고 그가 초창기에 습작으로 완성한 [제노제네시스]에 이르기까지 카메론이 묘사하는 SF는 근본적으로 어둡다.

ⓒ 1991 StudioCanal Image S.A. All rights reserved.

[터미네이터 2]에 사용된 미래 장면의 콘티. 기본적으로 제임스 카메론의 SF 영화속 미래는 어둡고, 공포의 대상이다.


비록 그의 작품들에 상당부분 액션이 강조되어 있고 그에 못지 않게 시각효과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같은 특징이 다소 희석되어있긴 하나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의 잠재의식은 분명히 나타난다. 그가 10년만에 들고 나타난 [아바타]가 SF라는 사실은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이 이번에도 여전히 반복될 것을 예상케 한다. 그 결말이 어떠하던 간에, 내러티브의 토대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당부분 반영할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리얼리티가 숨쉬는 액션이다. 사실 어떤 면으로는 카메론이 추구하는 액션이야 말로 그의 작품을 오락추구형, 혹은 상업영화로 단정짓게 만드는 불리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카메론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재미의 상당부분은 액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에이리언 2]가 전편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중 하나도 SF호러물이었던 전작의 성격을 카메론식 해석을 거쳐서 SF액션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터미네이터]의 경우 1편의 액션도 풍부했지만 그보다 몇배는 강력한 액션을 2편에 집중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의 액션은 단순히 물량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기억할 수 있는 '독특한 시퀀스'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에이리언 2]의 파워로더 시퀀스나 [터미네이터 2]에서 T-1000의 헬기 침투장면을 기억못할분은 없으리라 본다.)

ⓒ 20th Century-Fox Film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

[에이리언 2]의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파워로더 씨퀀스. 퀸 에이리언과 리플리의 박빙의 매치가 펼쳐지는 이 장면은 [에이리언]을 SF공포물에서 SF액션물로 변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특징은 바로 강한 여성상이다.(일부 문헌에선 이를 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데, 페미니즘에 대한 의미 자체가 변질되어 버린 오늘날에는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더군다나 카메론의 작품에서 강한 여성이 나오는건 사실이지만 그에 전적으로 의존할 만큼 약해빠진 남자 캐릭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호 보완적인 역할인 만큼 이를 극단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에이리언 2]의 리플리(시고니 위버 분), [터미네이터]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분), [어비스]의 린지(메리 E. 메스트란토니오 분), [트루 라이즈]의 헬렌(제이미 리 커티스 분), 그리고 [타이타닉]의 로즈(케이트 윈슬렛 분)까지.. 카메론의 영화는 얼핏 보면 마초적인 액션을 강조하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강한 의지의 여성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번 [아바타]에서도 시고니 위버나 미셸 로드리게즈 같은 여전사형 배우들이 출연하는데 이는 카메론의 이러한 성향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20th Century-Fox Film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

[트루 라이즈]의 히로인 제이미 리 커티스. 아놀드 슈왈제네거라는 걸출한 액션배우가 주연을 맡았음에도 평범한 주부에서 첩보원의 아내로 변모하는 그녀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이처럼 강인한 여성이라는 설정은 카메론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마지막 특징으로 최첨단 SFX기술과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들 수 있다. 로저 코만의 밑에서 특수효과 분야에 매진해 온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영화내에서 남들보다 한발 앞선 특수효과를 지향해 왔다. 심지어 저예산급의 [터미네이터]에서조차 그는 없는 살림에서도 최대한 부유해 보이는 특수효과를 선보였고, [어비스]에 이르러서는 환상적인 CG기술을, 그리고 초보단계의 몰핑기술과 [어비스]의 CG를 더욱 발전시킨 작품이 [터미네이터 2]다. 이번 [아바타]에서는 CG캐릭터를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이모션 퍼포먼스 캡처'를 선보이는데, 이것 때문에 나름 CG분야에서 꾸준히 한 우물을 파왔던 로버트 저맥키스는 야심작 [크리스마스 캐롤]의 개봉을 허겁지겁 앞당겨야만 했다!


ⓒ Paramoun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아바타]와의 정면 승부를 피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캐롤]이 개봉을 앞당긴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목인데 1994년 제임스 카메론이 엄청난 물량과 꼼꼼한 고증으로 완성시킨 [트루 라이즈]에게서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빼앗아 간 장본인이 바로 [포레스트 검프]의 로버트 저맥키스였기 때문이다. 이전의 3개 작품에서 카메론은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연달아 재패했지만 1994년만큼은 SF영화도 아닌 '드라마' [포레스트 검프]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반면 그의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내러티브를 채용해왔다. 실제로 그의 영화속에서 파격적인 설정은 찾아보기란 드문일인데([타이타닉]의 그 진부한 내러티브를 떠올려 보라. 지고불변한 선상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니! 또 [터미네이터 2]는 어떠한가?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와 소년이 친구가 된다? 허허허..), 이는 관객들이 그만큼 카메론의 영화에 몰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20th Century-Fox Film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

카메론이 [타이타닉]을 연출하겠다고 했을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타이타닉]은 이미 한물갔다고 여겨진 시대물의 성격을 띄었고 더군다나 카메론이 생각하고 있는 내러티브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카메론의 작품이 가진 현란한 비주얼과 농도짙은 액션 때문에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은 그가 아주 익숙한 공식을 가지고도 그럴듯하게 포장할 줄 아는 '숙련된 각본가'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IMDB의 자료에 의하면 카메론이 감독한 작품수(17편)보다 각본을 쓴 작품수(21편)가 더 많다.


실제로 '안전제일주의'를 선호하는 B급영화의 태생적 특성을 고려해 보면, B급영화계에서 출발한 카메론의 성격상 내러티브의 평이함 자체가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바타]의 경우도 긴 러닝타임에 비해 실제 내러티브의 구조 자체는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고 예상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플롯 자체는 평범할지라도 그 내용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 역시 카메론의 장기다. 그는 감독이면서도 각본가였고, 그렇기에 항상 그의 영화에서 허점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이것저것 두서없이 적어놓긴 했어도 제임스 카메론이란 인물, 그리고 그의 작품이 어떤 근원을 가지고 있는지 대강은 이해가 갔을 것이라 본다. 사실 그는 [타이타닉]으로 어마어마한 상업적 성과를 거두면서 동시에 아카데미 석권이라는 미국 영화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를 한몸에 안았다. 상업성과 작품성의 양립, 좀처럼 거두기 힘든 이 대기록을 세운 그를 아직도 어떤 부류의 감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다. 최고의 순간 직후, 그는 일선으로부터 물러나 있었고 따라서 관객들은 그에 대한 확실한 평가를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영화에 관한 한 '세상의 왕'이라 자평하고 있겠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성공한 상업감독으로 여기고 있거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여길 확률이 크다.

[아바타]는 제임스 카메론이 영화사에 어떤 감독으로 기억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 될 것이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아바타]에 얽힌 뒷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임스 카메론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국내 컬럼니스트 중에서도 카메론에 대해 가장 권위있는 글을 저술한 김정대님의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인생과 작품세계' 연작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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