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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 있어 박기정 화백의 만화는 그리 낯익은 작품들이 아니다. 1980년대 이서방문고에서 출간한 [두통이 만세]를 우연히 구해 그의 동생인 박기준 화백의 만화에 미칠정도로 매료된 적은 있어도 사실 이 분들은 나보단 아버지 세대에게 꿈을 안겨준 현역작가였다. 박기정 화백이 등단한 것이 1956년 [공수재]를 발표하면서부터니까 거의 반세기 전의 일이다.

 

유독 옛것을 소중히 다룰 줄 모르는 한국 문화 컨텐츠 시장의 특성상 이러한 시대의 걸작들은 영원히 볼 수 없는 먼 기억속의 단편으로 남아있거나 설령 존재하더라도 일부 올드팬의 개인 소장품으로 고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옆나라 일본만하더라도 데스카 오자무 같은 걸출한 작가들의 판본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아직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는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심한 자괴감마저 느낄 따름이다.

ⓒ 講談社 (KODANSHA). All rights reserved.

'권투만화'하면 떠오르는 것이 박기정 화백의 [도전자]나 박봉성의 [신의 아들], 허영만의 [변칙복서],[무당거미] 같은 한국작품이 아니라 치바 테츠야의 일본만화 [내일의 죠] (한국명: 허리케인 죠, 도전자 허리케인) 라는 사실은 참으로 씁쓸하다. '불태웠어... 새하얗게...'로 대변되는 엔딩의 강렬함이 워낙 인상적 깊기도 하지만 그만큼 일본만화가 한국에 미친 영향력은 우리것을 지켜내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다는 증거랄까.. 참고로 [내일의 죠]가 연재된 시기는 1968년, [도전자]는 1964년으로 [도전자]쪽이 4년이나 빠르다.


그러나 이제서야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는 듯, 2000년에 들어 한국만화의 발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만화 걸작선'이라는 타이틀로 출간되고 있는 일련의 고전만화들은 비록 보존의 한계상 100% 완벽한 형태를 띄고 있지는 않으나 남아있는 자료들의 복원과 재출간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후세대들에게 남겨지게 되어 그나마 우리 만화역사의 일부를 감상할 수 있다는 큰 의미를 가진다.

 

박기정 화백의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도전자]는 이러한 복간 기획에 의해 탄생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비록 10페이지 정도가 누락되어 있긴 해도 총 3부 45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작품을 40년이 지난 지금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것은 정말이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각주: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부천만화정보센터/바다출판사/박기정. All rights reserved.


어머니는 관동대학살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살해되고,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로 끌려가 탄광에서 얻은 병으로 잃게 된 백훈. 그는 자신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일본인 새엄마 덕택에 우등생으로 자라게 되지만 일본인에 대한 증오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 혼란을 느끼며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게 되고, 심지어 양어머니를 냉담하게 대하는 인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부천만화정보센터/바다출판사/박기정. All rights reserved.


일본인 급우들의 모함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시하메 패거리들과의 주먹질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며 살아가는 백훈은 어느날 친구인 오동추가 아르바이트로 대리 권투선수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복싱계에 입문해 링위에서 일본인을 마음껏 때려눕히지만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끼며 날이 갈수록 회의감에 빠져든다. 결국 그는 권투선수로서의 성공을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한 후 챔피언이 된 오동추와 큰 갈등의 골이 생겨 급기야 죽마고우와의 결전을 요청하게 되는데, 백훈이 진정 링 위에서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무엇을 위해 끝없이 도전해 온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부천만화정보센터/바다출판사/박기정. All rights reserved.


총 다섯권의 두텁고 묵직한 책으로 복간된 [도전자]는 세월을 뛰어넘은 한민족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작품으로서 재일교포 2세대인 백훈의 복싱 챔피언 등극기를 통해 한일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주제를 전달한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돌파구로서 권투를 택한 백훈의 모습은 6,25 동란과 같은 격동기를 겪어온 세대들의 마음 속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40년전의 작품답게 표현법이나 대사에서 풍겨나오는 정서의 차이는 일본만화를 보고 자란 탓에 [내일의 죠]가 더 익숙한 세대의 독자에게는 다소 이질감이 느껴질지 모르나 30대 이상의 키덜트 세대에게는 충분히 소화가능한 작품으로서 이후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 시리즈나 이현세 교수의 까치 시리즈로 이어지는 서사구조의 원조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우정사업본부. All rights reserved.

 

1998년 5월 4일, 만화시리즈 우표 4번째 작품으로 선정된 [도전자].


아울러 당시 독자들이 작가에게 직접 써서 보낸 편지가 실명, 주소와 함께 그대로 소개되어 있어 시간을 초월해 40년전의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는 듯한 느낌도 전달한다. 한가지 아쉬운건 박기정 화백의 필체가 아닌 개정된 폰트로 대사를 처리하고, 현대식으로 표현을 수정해 오리지널리티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기정/pennyway.net All rights reserved.

2009년 11월 4일 만화의 날 기념식 행사에 참석했다가 박기정 화백께 직접 받아온 싸인.


복간본이지만 한정 생산된 관계로 현재 오프라인과 온라인 서점에서는 대부분 품절이나 잘 찾아보면 간신히 구입할 수 있으니 혹시라도 관심이 있다면 서두르길 권한다. 앞으로도 박기정 화백의 [폭탄아]나 [레슬러], [은하수], [터번]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보게되길 희망한다.


* [도전자]의 모든 일러스트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사)부천만화정보센터/바다출판사/박기정.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우리 한국만화 꼭 사서 봅시다!



  1. 실제로 복간되어 있는 [박기당 컬렉션]이나 [오명천 컬렉션] 같은 작품들은 전권이 아닌 낱권만을 짤막하게 소개한 관계로 완결성에 있어서 소장가치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도전자]의 경우 작가가 보관하고 있던 보관본을 토대로, 누락된 내용은 만화수집가인 김응수씨의 수집품 2권을 제공받아 복간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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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rminee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난 번에 사인 받으러 가셔서 어찌 이름을 헷갈리셨나 했더니 그 두 분이 형제셨군요. 크
    옛날 만화들 계속 복간, 재발행 돼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못 보게 하셔서 놓쳤던 많은 좋은 작품들 좀 접할 수 있게요. ^^

    P.S. 글 타이틀 부분에는 '원작 2부 45권'이고 본문에는 '3부 45권'이라고 하셨네요.

    2009.11.12 09:59 신고
  2. 캅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거네요.. ^^
    그러고니 올해 SICAF 때 선생인 전시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ㅜ.ㅡ

    2009.11.12 13:39
  3. 돌이아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런 만화도 있었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허리케인죠 정말 강렬한 인상이었죠. 도전자. 근데 1권은 품절이네요 >.<

    2009.11.12 13:44
  4. 헬몬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기정 씨 글을 보니..이 만화에 담겨진 여러가지가 겪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어릴적 일본 아이들에게 놀림당하고 그러자 한 일본 아이를 죽어라 팼던 이야기라든지

    2010.03.2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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