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느와르의 전성기, 그리고 쇠퇴 |
필자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인 88년. 선글라스와 바바리 코트, 그리고 쌍권총을 든 주윤발의 [영웅본색]은 수많은 열혈남아들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들었으리라 본다. 이후 [첩혈쌍웅]으로 이어지는 홍콩느와르의 열풍은 좀처럼 식지 않아 수많은 아류작들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수입사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그만그만한 홍콩영화들을 수입해 오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왕정감독의 [지존무상]이후 홍콩느와르는 카지노액션 영화의 흐름을 타는가 싶더니, 무수한 졸작들의 난립으로 인해 흐지부지 사라지고, 서극감독이 일으킨 무술영화의 붐으로 인해 영영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나마 [황비홍]과 [동방불패]로 대변되는 무협영화의 전성기 때만 해도 홍콩영화계는 호황을 이뤘다. 그러나 한 영화가 히트하면 너도나도 따라하는 천편일률적인 아류작들은 가능성있는 장르의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야 말았다. 결국 거품이 잔뜩 들어간 홍콩영화계는 시대의 조류에 휩싸이지 않은 몇몇 감독들이 내놓은 작품들을 제외하곤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바야흐로 홍콩영화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오우삼이나 서극, 이안감독 등 홍콩,대만등지의 유망한 감독들이 헐리우드로 그 자리를 옮긴 것도 홍콩영화계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이제 아시아의 영화계는 이미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으로 인해 일찌감치 서양에서도 인정받은 일본영화와 해를 거듭할수록 무섭게 발전하는 한국영화에 의해 양분되고 있었다.
[무간도]의 등장 |
그러던 2002년, [고혹자]시리즈로 알려진 유위강 감독과 비교적 감독으로서의 인지도가 없던 맥조휘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무간도]란 작품이 개봉된다. 한물간 홍콩느와르라는 시대착오적 장르를 자처하고 나선 이 영화는 놀랍게도 홍콩 개봉에서 헐리우드의 강력한 흥행작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과 장예모 감독의 [영웅]을 누르고 개봉 4일만에 1350만 홍콩달러를 돌파하는 흥행 대기록을 달성한다. 이 주목받지 못했던 느와르 영화의 흥행은 두 감독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는데, 그들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생각하고 있던, 3부작 [무간도]의 제작에 청신호를 밝힌 것이었다. 이렇게 몇 년에 한번 나올까 한 3부작 느와르는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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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행도 한참 지난 홍콩느와르가 왜 이제와서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일까? 이 영화는 현재 홍콩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양조위라는 명배우, 그리고 홍콩영화계의 전성기와 침체기를 동시에 맛봐오면서 모든 장르를 두루 섭렵해 왔던 유덕화를 투톱으로 기용해 스타일과 연기력의 조화라는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맥조휘, 유위강 감독은 홍콩느와르하면 떠오르는 기존의 선입견을 깨는 것으로 이 영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를테면, 주윤발의 선글라스와 롱코트, 쌍권총과 비둘기 같은 오우삼식 액션의 비장함을 연상하게 되는 과거의 잔재들을 대신해 총격씬을 극도로 절제하고, 액션의 비중을 대폭 감소시켜 폼잡기에 급급했던 홍콩느와르를 과감하게 재해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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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서로 다른 입장에서 스파이로 잡입해있는 두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서로의 정체를 누가 먼저 밝혀내는가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시켜주고, 국보급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상미가 극의 흐름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쓸떼없는 폭력이나 유머가 섞이지 않은 정말 간만의 세련된 홍콩영화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홍콩영화의 부활을 알리다 |
소재부터도 범상치가 않다. 범죄조직에 잠입한 형사와 형사로 잡입한 조직원. 이 아이러니한 설정으로 감독은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더 이상 쌍권총이나 휘두르는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고 갈등하는 현실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홍콩영화의 특징인 사나이들의 의리와 배신, 우정이라는 소재가 사용되었지만 이 영화속에선 전혀 진부하지가 않다.
선악의 캐릭터가 비교적 분명했던 기존의 영화들과는 달리 두 명의 주인공 모두 선악의 가장자리에서 맴도는 인물들이다. 결국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지만, 살아남은 자가 행복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불교용어, 영원히 지속되는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을 뜻하는 "무간도"에서 계속 살아가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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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의 대성공으로 제작된 2편은 관객의 기대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2편의 기획역시 상당히 이채로운데, 감독은 1편에서 영화의 성공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던, 양조위와 유덕화를 과감히 제외시키기로 한다. 대신 1편에서 그들의 청년역할로 잠깐 등장했을 뿐인 진관희와 여문락이라는 신인급 배우들을 전격 주연으로 기용하게 되는데, 이런 감독의 과감한 결정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 두 젊은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는 [무간도]라는 걸작의 이름에 손색이 되지 않게 매우 자연스런 연기를 펼쳐주고 있다.
그리고 1편에 이어 등장하는 황추생과 증지위라는 관록있는 배우들이 두 젊은 배우가 가지지 못한 카리스마의 부재를 잘 보완해 주고 있어 영화는 흡잡을데 없는 균형의 미를 이룬다. 주연 배우의 교체에서 볼 수 있듯, 2편은 1편에 대한 프리퀄의 형식으로서 두 남자가 각기 서로의 정체를 감춘체, 스파이로 잡입해야만 했던 상황들을 좀 더 면밀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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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편의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 관객은 이 놀라운 작품에 대한 감독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하기에 이른다. 이제 1편의 이후 스토리가 되게 될 이 작품에는 다시 유덕화와 양조위가 캐스팅 되었고 ,그에 더해 역시 홍콩영화계의 4대천왕중 한명인 여명과 [영웅]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진도명이 가세함으로서 더욱 탄탄한 배역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3편은 1편이 끝난 시점에서 남아있는 자들의 후일담이 그려짐과 동시에, 과거로의 플래시백을 통해 2편과 1편의 내용연결을 위한 추가설명, 그리고 더 나아가 3편의 결말과의 연계점을 구성하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감독과 각본을 동시에 책임진 맥조휘에 대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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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무간도] 3부작은 비록 발전 단계이긴 해도 걸작이라 불릴 만한 3부작 영화를 가지지 못한 우리영화계의 입장 ([장군의 아들] 3부작이나 [투캅스] 3부작을 떠올리진 않으리라 본다 ㅡㅡ;;) 에선 부러운 작품이다. 물론 앞으로 국내에서도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곧 나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역시 무간도는 홍콩영화계의 부활을 알리는 대단한 작품이다. (필자가 홍콩영화를 이 정도까지 칭찬하는일은 거의 없다)
결국 이 작품은 미국으로 건너가 명장 마틴 스콜세지의 손에 리메이크되어 '무관의 제왕'이었던 스콜세지 감독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주는 뜻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물론 헐리우드식 냄새가 풍기는 [디파티드]보다는 [무간도]쪽이 훨씬 더 우리의 정서에 맞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디파티드] 또한 원작의 무게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는데 매우 성공적인 작품임을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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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으로 배우 유덕화에 대해 한마디. 이 아저씨는 61년 생이다. 도대체 뭘먹길래 늙지도 않는건지.. 15년전에 처음 본 모습 그대로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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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간도] 시리즈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환아공사(寰亜公司 )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디파티드(© 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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