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강타한 스포츠라면 단연 농구일 겁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농구라는 운동을 접하게 되었는데, 남들과 비교하면 꽤 늦은 시기에 시작한 운동이었죠. 그 전까지는 아예 농구라는 종목에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제가 뒤늦게나마 농구를 시작한 이유는 농구라는 스포츠가 그 시대의 트렌드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1991~1993년까지 시카고불스를 NBA 정상에 올려놓은 마이클 조던은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장동건, 손지창 주연의 [마지막 승부]는 심은하라는 걸출한 신인을 발굴한 드라마 이상으로 한국의 농구 붐에 크게 일조한 작품이었고, 기아 vs.연세대의 불꽃튀는 승부로 큰 인상을 남겼던 1994-95 농구대잔치 역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했지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슬램덩크]가 남긴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농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슬램덩크]는 남녀를 막론하고 엄청난 인기를 누렸죠. 오죽하면 아들이 태어나면 태웅이라는 이름을 짓고 싶어서 일부로 서씨 성을 가진 남자만 골라 사귄 여성이 있다는 풍문도 돌 정도였으니까요. 비록 원작만화 만큼은 아니었지만 TV 애니메이션과 극장판으로도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학원물로서도, 스포츠물로서도, 성장물로서도 어느 하나 장르적 재미에 소흘하지 않았던 [슬램덩크]는 작 중 4개월에 불과한 내용들을 장장 6년 여간 연재하면서 대장정의 막을 내립니다. 산왕공고라는 끝판왕 격인 팀과의 격전 이후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로 마무리를 했기에 팬들의 아쉬움은 더 깊었죠. 혹시나 속편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슬램덩크]는 그 아쉬운 결말을 끝으로 "박수칠 때 떠나라"는 조언을 충실히 이행했어요.
[슬램덩크]의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기억하는 세대들은 이제 대부분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에 있어서 [슬램덩크]는 그렇게 까지 와닿는 작품이 아닐겁니다. 아빠, 엄마 세대에 유명했던 만화 정도로 알고 있으면 다행일까요. 그런데, 그렇게 화석화가 되어 가던 [슬램덩크]가 극장판으로 돌아왔습니다. "더 퍼스트"라는 수식어를 달고 등장한 이 극장판은 그간 영상화 되지 않은 산왕전을 소재로 어떤 의미에선 정말로 “최초”가 맞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설마 이게 한국에서도 통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했었는데, 그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거의 500만명에 육박하는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가히 슬램덩크 신드롬을 형성할 정도였습니다. 만화책도 단 두 달만에 단행본 100만 부를 찍었다고 하니 말 다했죠.
그럼 이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화자는 의외로 북산의 돌격대장인 송태섭입니다. 아마 여자들이라면 서태웅을, 남자들이라면 불꽃남자 정대만을 선호할 테지만 명실공히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강백호 였다는 걸 생각하면, 빈약한 서사와 낮은 인지도(?)를 가진 송태섭이 주인공인건 다소 의외입니다.
아마도 이는 원작자인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사심이 작용한 듯 합니다만 어쨌든 기존의 [슬램덩크]를 수십번도 더 읽었던 팬들이라면 새로운 서사로의 접근이라는 차원에서 꽤나 영리한 전략인 셈입니다. 특히나 역경을 딛고 성장을 이뤄내는 상왕전의 이야기와 전체적인 맥락에서도 일치하고 말이죠.
그래서인지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플래시백을 사용한 교차편집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산왕과의 경기 도중 송태섭의 과거사를 비춰주는 식의 내용으로 전개가 되지요. 이 부분은 분명 호불호를 낳습니다. 경기내용에 한창 집중할 타이밍에 흐름이 끊기는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죠. 그러나 이노우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여줌에 있어서 단지 만화책의 영상화라는 수준에서 만족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스토리를 넣어 기존의 익숙한 산왕전을 보다 다른 감성의 차원에서 느껴볼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봐요. 마냥 문제아처럼 보였던 송태섭의 감춰진 서사는 그가 차기 캡틴으로서 북산의 미래를 짊어질 만한 플레이어라는 개연성을 부여했고, ‘코트 위의 사령관’인 포인트 가드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아주 적절한 빌드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대했던 산왕전은 그야말로 전율입니다. 대사없이 진행되는 마지막 1분의 그 숨막히는 서스펜스는 만화책에서 느꼈던 감정을 거의 여과없이 옮겨놨어요. 보면서 울컥했습니다. 잊고 있었던 30년 전의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오는 느낌이었어요.
마지막의 미국 씬은 개인적으론 좀 오버같긴 한데, 이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 보고 그럴만한 정황도 충분히 나온 상태라 (나미사토 나리토의 스토리) 더 언급은 안하겠습니다. 어찌되었던 본 작품의 주인공은 송태섭 이니까요.
저는 아내와 초딩 아들을 데리고 극장에서 감상을 했었는데, 솔직히 우리 세대의 감동을 아들 녀석이 느낄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만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몰입해서 보는 걸 보고 역시 명작은 명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로서 [슬램덩크]의 감동은 또 한 세대를 이어 전해지겠지요.
P.S
1.공교롭게도 블루레이 발매 시점에서 얼마 안되어 (개봉일로부터는 무려 1년 넘은 시점에) 리뷰를 오픈했네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말 그대로 극장판입니다. 블루레이로 시청하면 완전히 다른 감흥일 겁니다. 이건 무조건 극장에서 봤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2.일본어, 우리말 더빙 둘 다 감상한 입장에서는 우리말 더빙의 압승입니다. 좀 아쉬운 건 김승준(서태웅), 구자형(정대만), 이정구(채치수) 등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중인 원년 성우들을 대거 교체한 점이긴 한데, 디렉션을 최대한 기존 성우들의 느낌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더군요. 연임에 성공(?)한 강수진 성우는 예전만큼의 텐션은 좀 아니었지만… 여튼 반가웠습니다.
3.송태섭의 시각으로 본 산왕전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정대만의 시각으로 본 상양전이라든가, 서태웅의 시각으로 본 해남전 같은 주요 이벤트를 하나씩 극장판으로 만들어서 [더 핍스 슬램덩크]까지 만들어 줬으면 하는 생각은 있습니다만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성격상 이번에도 박수칠 때 떠날 것 같긴 합니다.
4.극 중 채소연의 비중이 먼지 수준이고, 게다가 캐릭터 디자인 조차 미형이 아니어서 말들이 많은데 그건 이 작품이 송태섭의 시점에서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한나의 미모는 엄청나게 버프되어 있습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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