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137
시간을 잠시 되돌려 1982년의 헐리우드 극장가로 돌아가 봅시다. 헐리우드에서는 가끔씩 포텐이 터지는 해가 있는데요, 바로 1982년이 그랬습니다. 특히나 1982년은 SF영화사의 기념비적인 해였습니다. 리들리 스콧의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 최초의 CG가 도입된 디즈니의 야심작 [트론], 그리고 트레키들의 영원한 바이블 [스타트렉 II: 칸의 분노] 같은 쟁쟁한 SF영화들이 대거 쏟아졌지요. 물론 이 치열한 각축전에서 살아남은건 단연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였습니다. 1
사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나 [타이타닉]이 박스오피스 최상위를 점령하고 있는 지금으로선 조금 실감하기 어려울 순 있습니다만 그 전까지만해도 [E.T]는 십수년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킨 작품입니다. 1982년에 나온 작품이 지금까지도 역대 북미 박스오피스 9위에 랭크되어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죠. 이는 재개봉으로 순위권을 탈환한 1977년 작 [스타워즈]를 제외하면 역대 박스오피스 10위권 가운데 두번째로 오래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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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특이한만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E.T]를 접한 건 이로부터 무려 2년이나 지난 1984년이었다는 겁니다. 뉴스에서는 연일 [E.T]의 흥행돌풍에 대해 실시간으로 방송했으나 막상 국민들은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요. 안달이 난 극장주들은 [E.T]의 수입설이 나돌자 마자 시설을 현대식으로 바꾸는 등 대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만 1년이 넘도록 [E.T]의 수입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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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웃지못할 해프닝도 벌어지곤 했는데요, 롯데삼강의 ET콘과 빙그레의 EaT콘이 상표권을 놓고 법정공방까지 간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E.T]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새운 이 두 회사의 상표권 분쟁은 저작권자의 동의도 없이 누가 서로 먼저 [E.T]의 캐릭터를 무단으로 갖다 썼는지 시비를 가렸던 일종의 촌극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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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방송국에서는 MBC 인형극 ‘모여라 꿈동산’을 통해 [한국에 온 E.T], [E.T와 드라큐라]를 방영했고, KBS에서는 라디오 드라마 [내친구 E.T] 같은 창작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전파를 타기도 했습니다. 대성음반에서 발매된 ‘이티 이야기’는 김창완이 연출을 담당한 산울림 밴드의 드라마 앨범으로 배한성의 내레이션과 더불어 박영남, 손정아 등 유명 성우들의 열연, 그리고 김창완의 정겨운 보컬 주제가가 인상적이었던 독특한 어린이 음반이었지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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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계와 애니메이션계도 당연히 이 큰 왕건이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슈퍼로봇과 [E.T]를 접목시킨 이영수 감독의 [항금연필과 외계인 왕자]와 조민철 감독의 [UFO를 타고 온 외계인 왕자]는 [E.T]의 개봉이 지연되는 틈을 타 틈새시장을 공략한 애니메이션이었지요. 두 작품 모두 의외의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는 뒷담화는 뭐 그냥 한귀로 듣고 흘리시길...
만화로는 상당히 많은 만화가가 이 [E.T] 만화를 그려댔는데, 먼저 클로버문고로 발행된 단행본은 김승연 작가가, 보물섬 창간호에 연재된 만화는 채일병 화백이, 청문출판사에서는 장원식 작가가 그린 [E.T. 외계인 수색작전]이 나온 바 있지요. 그 밖에도 [E.T]관련 만화와 그림, 소설은 정말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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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인가요. [E.T] 관련 프렌차이즈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장난감 피규어 시장도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는데요, E.T 물총이나 도시락, 물병, 지우개 등 수많은 [E.T] 관련 상품들이 홍수를 이루었지요. 여하튼 국내에서의 [E.T] 열풍은 오히려 극장개봉 전에 더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E.T]앓이는 굳이 말하자면 한국의 상황만은 아니었어요. 특히 [E.T]의 아류작들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작품은 [바디 Badi]란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E.T]가 개봉된지 1년 후에 터키에서 만들어진 짝퉁영화로서 이미 괴작열전을 통해 숱하게 살펴본 터키산 괴작의 리스트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먼저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내성적인 소년 알리입니다. 편모슬하의 내성적인 소년이라... 어째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요? 음... 좀 더 관람해 봅시다.
알리는 특히 동물을 사랑하는 아이인데요, 어느날 길잃은 개를 돌봐주면서 가까워지지만 그 개는 지역 경찰관의 총을 맞고 즉사합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된 알리를 잠시 뒤로하고 이야기는 세 명의 어른들에게로 넘어가는데, 외계인을 쫓는 과학자 삼총사입니다. 이들은 여자 한명과 놈팽이 한명, 그리고 노인네 한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희한한 팀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 불가) 바로 이들이 바디의 우주선 착륙을 최초로 목격하는 인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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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야기는 알리로 돌아와 늦은 밤 숲 속에서 바디를 목격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이윽고 친구가 된 둘은 학교에도 같이 가고 놀이공원에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놀이 기구를 태워주는 등 신통방통한 능력들을 보여주다가 결국 우주선을 타고 자기 별로 돌아갑니다..... 엥?
대충의 스토리를 보심 알겠지만 [바디]는 [E.T]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온 작품입니다. 여기에 터키식 설정을 약간 덧붙여 저예산으로 만든 것이지요. 실제로 상당수의 시퀀스는 오리지널 [E.T]와 중복되는 것이 많은데요, 몇몇 장면을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검지 손가락으로 알리를 치료하는 장면 (때리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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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알리의 여동생이 바디를 보고 놀라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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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그 유명한 비행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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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으면 실로 정신이 멍해지는데요, 이게 과연 [E.T]가 나온지 무려 1년이나 지난 뒤에 나온 작품이라는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줄거리를 짜깁기하다보니 플롯의 구멍이 숭숭 나 있는데요, 일례로 [E.T]에서는 E.T가 낙오된 이유가 지구에 식물채집을 위해 왔다가 위기를 감지한 모선이 황급히 떠나는 바람에 미쳐 우주선에 타지 못한 E.T가 지구에 남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에서는 그런거 없이 우주선에서 바디가 뒤뚱뒤뚱 걸어 나오자 우주선은 문닫고 그냥 날아가 버립니다 -_-;;;
외계인 포획에 혈안이 된 지구의 과학자들과 외계인 간에 벌어지는 서스펜스가 실종되다 보니 위기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오히려 바디를 숨기기보다는 학교에 데려간다거나 마을사람들과 어울리는 등 공개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동심과 어른의 시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의 갈등양상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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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만든 특수효과는 또 어떤가요. 그 유명한 E.T의 비행씬도 시름시름 앓아가는 바디에게 기운을 북돋워 주고자 바디를 리어카에 태우고 나갔다가 기분이 한층 좋아진 바디가 리어카 채 공중부양을 하는 걸로 처리되어 버렸습니다. 하다못해 손가락에 불이 켜지는 기본적인 특수효과는 고사하고 비행씬에서는 화면의 색조 자체가 바뀌어 버리며, E.T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대갈장군입니다. 이러니 감동은 커녕 또다시 정신이 멍해지는...
어쨌거나 헐리우드 대작들을 로컬라이징 시켜버리는 터키산 괴작 영화의 근성은 알아줘야 할 듯 합니다. 앞으로 다룰 터키산 괴작들의 리스트만 봐도 현기증이 나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E.T]관련 애니메이션은 꽤나 창의적인 작품인 셈입니다.
P.S: [E.T]의 벤치마킹은 비단 이 작품만은 아닙니다. [E.T와 부시맨]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남아공산 짝퉁 [누키 Nukie]와 [맥과 나 Mac and Me]같은 작품들도 만만찮은 괴력(?)을 발산하는 영화들이지요. 기회가 되면 다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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