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열전(續篇列傳) No.33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액션 배우에게 있어 자신만의 프렌차이즈가 있다는 건 대단한 메리트입니다. 실베스터 스텔론에게는 [람보]와 [록키]가, 아놀드 슈왈제네거에겐 [터미네이터]가, 브루스 윌리스에겐 [다이하드]가, 웨슬리 스나입스에겐 [블레이드]가, 장 끌로드 반담과 돌프 룬드그렌에겐 [유니버셜 솔져]가 있죠.
액션 배우라는 직업이 다른 배우들처럼 언제나 신체적 장점을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이가 들 수록 이런 프렌차이즈의 중요성은 더 커집니다. 아무리 인기가 바닥을 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나 아직 안죽었다'고 기사회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거든요. 더구나 그 마지막 기회마저 실패한다해도 팬들에게는 영원히 그 캐릭터로 기억될테니 말이죠. 물론 한 가지 캐릭터로 고정된다는 건 좋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하나쯤은 자신만의 프렌차이즈가 있는게 훨씬 유리하다는 얘기입니다.
빈 디젤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블록버스터 [트리플 엑스]를 통해 잘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제로 그의 재능을 알린 영화는 [에이리언 2020]으로 알려진 [피치 블랙]과 [분노의 질주]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짧은 전성기 이후 줄곧 내리막을 걸을 뻔한 그가 그나마 액션 스타로서의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작품 역시 [분노의 질주] 시리즈이지요. 거의 불씨가 꺼져가던 시리즈가 무려 6편 이상 이어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분노의 질주]의 도미닉보다도 그 이전부터 빈 디젤에게 더 적합한 캐릭터가 있었으니 [에이리언 2020]의 리딕이란 캐릭터입니다. 실제로 빈 디젤은 [분노의 질주 2]에는 참여하지 않고, 대신 [트리플 엑스]를 선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속작으로 [에이리언 2020]의 속편인 [리딕: 헬리온 최후 빛]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만큼 빈 디젤도 [분노의 질주]보다는 [리딕] 시리즈의 가능성을 더 크게 보았다는 뜻일 겁니다.
주로 완성도 높은 저예산 영화를 감독했던 데이빗 토히의 [에이리언 2020]은 개봉당시 평론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제법 쓸만한 흥행기록을 가진 것 외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2차 판권시장에서 컬트팬들의 입소문을 타고 숨겨진 저예산 SF 크리처물의 걸작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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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2020]의 장점이라면, 철저한 B급 무비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상외의 결말과 캐릭터 묘사로 매끈하게 빠진 크리처물의 장르적 재미에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리딕이라는 선과 악의 경계에 위치한 캐릭터의 존재감은 기대 이상입니다. 굵직한 저음과 묘한 분위기의 눈빛을 발산하는 리딕은 영화 내내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지요. 빈 디젤이 아니고서는 소화해 낼 수 없는 느끼함과 기묘함, 터프함을 가진 인물이랄까요.
실제로 영화의 오리지널 엔딩은 리딕의 희생으로 여주인공 프라이와 생존자들이 행성을 탈출하는 것으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편집 과정에서 프라이가 죽는 엔딩으로 대체했다고 하는데, 이는 관객들이 프라이라는 인물보다 리딕에게 관객들이 더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고,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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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엑스]의 대성공과 더불어 인기스타가 된 빈 디젤은 다시금 데이빗 토히 감독과 함께 리딕의 속편을 만들게 되는데, 저예산 크리처물인 전작과는 달리 이번에는 1억달러짜리 대작 블록버스터로 변모되었지요. 전편의 라다 미첼도 아주 좋은 배우이긴 합니다만 스타성이나 지명도에서 살짝 모자른 감이 있었던 반면 이번에는 [미션 임파서블 2]의 탠디 뉴튼, 오스카 수상자인 주디 덴치, [반지의 제왕]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칼 어번 등 호화캐스팅으로 많은 기대를 모았습니다.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은 전편에서 괴물들의 혹성을 탈출한지 5년 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얼음혹성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은둔하던 리딕은 갑작스럽게 현상금 사냥꾼에게 쫓기게 됩니다. 위기를 넘긴 리딕(빈 디젤 분)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는 단 한명, 전편에서의 생존자 이맘(키이스 데이빗 분)을 추궁하기 위해 찾아가지만 그가 리딕을 은둔생활에서 불러낸 이유는 헬리온 행성을 지배하려는 '네트로몬거'라는 종족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지요.
그들은 자신의 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하는 행성의 문명을 모두 말살시켜버린 후, 정복의 상징으로 죽음의 조각상들을 곳곳에 남겨놓는 악명높은 종족이었습니다. 헬리온 행성의 원주민인 엘리멘탈 족의 지도자 애리온(주디 덴치 분)은 네크로몬거의 천적인 퓨리온 족의 유일한 후예라고 믿고 있는 리딕만이 자신들의 희망임을 알리지만 리딕은 이를 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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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리딕은 전편에서 살아남은 또 한명의 인물인 잭이 이름을 키라로 바꾼 채 한 행성의 지하 형무소에 갇혀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진해서 현상범 사냥꾼에게 사로 잡혀 키라를 구출합니다. 리딕은 그를 동경하면서도 사랑하는 키라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지만 네크로몬거의 지도자 마셜이 파견한 군사들에 의해 그녀를 빼앗기고 맙니다. 이제 리딕은 자신이 원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네크로몬거와의 싸움을 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에이리언 2020]이라는 극악의 국내개봉명에서 알 수 있듯, 전편은 다분히 SF 호러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말해 이 시리즈는 단순한 액션물은 아니었다는 얘기죠. 사실 전작에서 원안대로 리딕을 죽이지 않고 대신 프라이를 죽게만든 엔딩을 개봉하고서 분명 제작진들은 이 리딕이라는 선과악의 경계에 있는 묘한 케릭터의 매력을 잘 알았을 겁니다. 나중에 써먹으면 돈 좀 벌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요.
그래서인지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은 전작에서 보여준 연출의 긴장감이라던가 설정상의 신선함을 모두 배제한채, 오로지 리딕이라는 인물의 영웅적인 활약상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해서 리딕이 아니라 빈 디젤을 부각시키는 셈이 되었습니다. 사실 전작에서의 리딕은 그렇게 아크로바틱한 액션을 선보이는 인물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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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탈골시켜서 탈출을 감행하는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는 보여줬지만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에서 그는 마치 [트리플 엑스]의 빈 디젤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몸동작의 고난도 액션으로 화면을 수 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전작의 신선함을 기대하고 찾아온 관객들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는 셈이지요. 속편이라는 녀석이 장르 자체를 탈바꿈시켰는데 이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습니까?
덕분에 주디 덴치를 비롯한 유망한 배우들의 역할도 빈 디젤의 원맨쇼에 의해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조연들의 역할이나 존재감이 너무 미미해서 이름값을 못했다고나 할까요. 덩치만 키운다고해서 될 문제가 아닌것을, 전작에서 충분히 저예산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음을 증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빗 토히 감독에게 있어 처음 주어진 1억달러짜리 프로젝트는 이렇게 어정쩡한 결과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감독은 이 영화를 [코난]급의 서사적인 대작반열에 올릴만한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던 듯 합니다. '리딕의 연대기'라는 거창한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속편을 암시하는 마무리를 보더라도 그 점은 명백하지요. 전편과 이번 작품을 연결하는 에니메이션 [리딕: 다크 퓨어리]를 보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할 몇가지 상황들에 대한 불친절한 설명들도 불만입니다. 사실 어떤 면으로는 [리딕: 다크 퓨어리]가 훨씬 더 [에이리언 2020]의 속편의 성격에 걸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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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의 팬들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신선함을 기대하게 했고 , 더욱이 주연인 빈 디젤의 이름값만큼이나 관심을 모았던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자국인 미국에서조차 문자 그대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이 작품의 제목에 빗대어 '어처구니 없는 Ridiculous 영화'라며 야유를 보냈고, 극장을 찾은 관객조차 영화를 외면했으며, 전편에 열광했던 팬들조차 고개를 저었죠. 특히 국내에선 이 영화를 단지 '빈 디젤이 새로 찍은 영화인가보다'하고 생각했던 관객이 대다수였을 것인데, 전작과의 별다른 연계성을 확보하지 못한 제작사의 홍보 또한 신통치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원래 [리딕: 헬리온 최후의 빛]은 [에이리언 2020]의 씨퀄이 아닌 프리퀄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계획이 변경되어 애초의 프리퀄 계획은 또다른 미디어믹스 형태인 게임으로 출시된 [리딕의 연대기: 부처베이 탈출]이 대신하게 됩니다. 게임은 영화와는 달리 만점에 가까운 극찬을 받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원안대로 영화를 프리퀄로 제작해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시리즈 3편인 [리딕]에서는 어깨에 힘을 빼고, 다시금 본연의 크리쳐물로 돌아왔다니 한번 기대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P.S:
1.빈 디젤은 이 작품을 통해 2004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안타깝게도(?) 수상에는 실패합니다. 이 해의 수상자는 [화씨 911]의 조지 W. 부시였거든요. ㅎㅎㅎ
2.[에이리언 2020]에서 잭 역을 맡은 호주배우 리아나 그리피스는 이번에도 같은 역을 맡기 위해 오디션에 참여했습니다. 오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강도높은 수준으로 진행될 예정이어서 다소 깡마른 이미지의 그녀는 킥복싱 트레이너까지 고용해 몸 만들기에 들어갔습니다만 오디션까지는 고작 3주밖에 없었고, 결국 탈락했습니다. 대신에 애니메이션 [리딕: 다크 퓨어리]에 성우로 참여해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지요. 개인적으로는 알렉사 다발로스보다 리아나 그리피스가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 모양새에 있어서는 훨씬 더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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