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열전(續篇列傳) No.15
1987년작 [월 스트리트]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올리버 스톤은 그간 [살바도르]나 [플래툰], [7월 4일생]과 같은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어 왔는데, 이러한 영화들의 이면에는 항상 미국의 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 있었죠. 그로인해 올리버 스톤은 헐리우드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사회파 영화의 기수로 떠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월 스트리트]는 [토크 라디오]와 더불어 스톤의 대표작 가운데서 소외된 영화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월 스트리트]에 대한 스톤 자신의 평가도 다른 영화에 비해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연출했다는 소견을 밝힌 바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 스트리트]는 그렇게 만만한 작품이 아닙니다. 월가의 큰손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분)와 그를 쫓아 자신의 야심을 성취해 보려는 신참 증권 브로커 버드 폭스(찰리 쉰 분)의 이야기는 현 자본주의의 추악한 뒷모습과 인간이 가진 욕망에 대해 꽤나 냉소적인 시선을 드리웁니다. 아마도 이처럼 증권가의 블랙 커넥션을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올리버 스톤의 부친이 유태계 증권 중개인이었던 것과도 크게 무관하지 않을겁니다.
ⓒ 20th Century Fox. All Right Reserved.
특히 [월 스트리트]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게코 역의 마이클 더글러스였습니다. 실제적인 주인공이 찰리 쉰이 맡은 버드 폭스였음에도(이 작품에서 마이클 더글라스의 등장시간은 딱 25분 뿐입니다) 아카데미는 그해 남우 주연상 수상자로 마이클 더글라스를 지목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뼛속까지 탐욕으로 똘똘뭉친 냉혹한 자본가를 연기하면서 그의 연기인생에 터닝포인트를 마련합니다. 사실 아버지 커크 더글러스에 비해 연기자로서의 인지도가 낮았던 그로서는 이 작품 이후 탄탄대로를 밟게 되지요. (당시 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배우는 [굿모닝 베트남]의 로빈 윌리엄스, [엉겅퀴꽃]의 잭 니콜슨, [브로드캐스트 뉴스]의 윌리엄 허트 등 쟁쟁한 배우들이었습니다)
이제 [월 스트리트]가 개봉한 지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미국은 서브 프라임 사태라는 금융위기를 겪으며 아직도 긴 위기감의 터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이 시점에서 올리버 스톤은 생애 최초의 속편을 내놓습니다. 무려 23년만의 속편이라니, 감회가 새롭지 않습니까?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는 전편에서 내부 정보누출과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기소된 고든 게코가 8년을 복역한 후 출소한 현 상황의 미국 금융시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원래 올리버 스톤은 제목을 [월 스트리트 2]라고 하려다가 숫자 2를 빼고 대신 '머니 네버 슬립스'라는 부재를 붙이기로 했다는데, 이는 본 작품이 전편을 잇는 속편이지만 전편과는 별개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Money never sleeps라는 표현은 본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전편에서 고든 게코가 새벽에 전화로 버드 폭스를 깨우면서 하는 대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샤이아 라보프가 연기한 제이콥 무어라는 인물인데요, 전편의 버드 폭스처럼 증권 브로커이지만 폭스같은 야심가라기 보다는 이상주의자에 가깝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약혼녀는 웹사이트를 통해 사회운동을 하는 위니 게코(캐리 멀리건 분)인데, 바로 고든 게코의 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와 연을 끊은채 살고 있지요. 두 사람의 미래는 순조로워 보입니다만 어느날 제이콥의 멘토이자 고용주인 루(프랭크 란젤라 분)의 자살로 인해 제이콥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 20th Century Fox. All Right Reserved.
이 사건을 계기로 제이콥은 악성루머를 퍼트린 악랄한 사업가 브랫(조시 브롤린 분)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게 되는데, 때마침 출소 후 강연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고든 게코를 만나게 됩니다. 고든은 소원하진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면 브랫을 파멸시키도록 힘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제이콥은 위니 몰래 고든과의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은 법. 이 과정에서 제이콥은 위니와의 사랑은 물론 재산과 직업 모두를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는 노년이 된 고든 게코와 정직한 증권 브로커, 그리고 전편이 고든 못지 않게 악랄한 투자자와의 미묘한 관계를 엮어가며 이 시기에 벌어진 미국 금융위기를 조명합니다. 영화의 소재 자체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편이 몇몇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개인의 탐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속편은 보다 넓은 범위에서 미 금융가의 부도덕성에 주의를 돌립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을 옭아매고 있는 금융위기의 원인이 자본가들 스스로에게 있음을 올리버 스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견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올리버 스톤도 이젠 나이를 먹은 걸까요? 조금은 그 날카로움이 무뎌진 느낌입니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오랜만에 자신의 맞춤 캐릭터를 연기한 고든 게코는 영화상에서 전편만큼의 화면 장악력을 행사하진 못합니다. 게코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딸과의 관계회복에 나선 퇴물 아빠로서의 모습은 [더 레슬러]에서 미키 루크가 연기한 '랜디 더 램'에 비해 한참 부족해 보입니다. 오히려 고든 게코라는 캐릭터를 지탱시켜 주는건 전편에서 쌓아올린 악당 자본가의 잔영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마이클 더글러스는 그야말로 전작의 명성에 기대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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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고든의 어중간한 캐릭터 묘사는 이 영화의 메인 악당인 브랫의 존재감마저 위태롭게 만듭니다. 전편에서 고든과 버드의 두 인물로 이야기가 압축되어 전개된 반면, 속편은 브랫과 제이콥, 여기에 고든이 곁다리로 끼어있는 모양새여서 이야기의 집중도가 분산되는 감이 있습니다.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미 금융위기에 대한 풍자인지, 아니면 전형적인 헐리우드 가족영화의 미덕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죠. 심지어 대체 에너지의 필요성에 대해 슬그머니 주장하려고 하는 듯 한데, 지금까지 올리버 스톤의 작품성향으로 봐서는 너무 생뚱맞거나 소심해 보입니다.
전개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농도짙은 서스펜스가 깔려있어 관객의 시선을 빨아들였던 전작에 비해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는 지나치게 정형화 되어있고 루즈합니다. 그래서 극적인 효과의 정점에 올라야 할 반전마저도 충분히 예측가능하게 되어있어요. 결국 이번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올리버 스톤은 확실히 속편 체질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주 엉망이란 뜻은 아니에요. 다만 감독의 이름값에 비해, 특히 그의 첫 번째 속편이자 23년만의 후속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결과가 실망스럽다는 걸 부인할 순 없습니다.
P.S:
1.샤이아 라보프와 캐리 멀리건이 실제 연인사이인건 아시죠?
2.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다름아닌 버드과 고든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서 '사고치고 다니지 말라'며 어깨를 툭툭 치는 버드의 모습에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생기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전작에 등장한 숀 영이나 테렌스 스탬프 같은 왕년의 스타들이 다시 등장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3.다른 캐릭터이긴 합니다만 전편에서도 '루'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다소 도덕적인 설교를 버드에게 베풀었던 인물인데 그때는 할 홀브룩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4,어쩌면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루즈하게 느껴지는 건 각본을 올리버 스톤이 직접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더군요. 원래 감독으로 명성을 떨치기 전까지 그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나 [스카페이스] 같은 작품들의 각본가로 더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전편인 [월 스트리트]도 직접 각본을 담당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오로지 연출만 담당했습니다.
5.영화 외적인 흥미거리 하나를 말씀드리면 이 작품엔 세 명의 전직(?) 대통령이 등장합니다. 조시 브롤린은 스톤의 전작 [W]에서 부시 대통령을 맡았고, 안소니 란젤라는 [닉슨 대 프로스트]에서 닉슨 대통령을, 그리고 마이클 더글라스는 [대통령의 연인]에서 앤드류 대통령 역을 맡았었죠.
6.영화의 엔딩에 대해 올리버 스톤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스포일러상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습니다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올리버 스톤 다운 마무리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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