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No.11
여러분은 '서스펜스의 대가'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는지요? 아마 영화 좀 봤다하는 분들은 주저없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헐리우드에 히치콕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앙리-조르주 클루조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그만큼 스릴러물의 대가로서 H.G 클루조의 명성은 히치콕에 버금가는 당대의 라이벌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도로 서스펜스를 다양하게 구사했던 히치콕과는 달리 클루조의 스타일은 상당히 스트레이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그의 작품속에 나타나는 음울한 비관적 그림자는 프랑스 누아르의 정통을 시종일관 유지해 온 몇 안되는 감독으로서 그를 각인시켰습니다.
하지만 1947년작 [까마귀]에서 프랑스 소도시를 비관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인해 반 프랑스적인 영화인으로 몰린 그는 한때 프랑스 영화계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런 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6년만에 재기에 성공한 작품이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1953년작 [공포의 보수]입니다. 조르주 아르노(Georges Arnaud)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오늘날 스피디한 템포의 스릴러 영화에 중독된 관객들에게는 꽤나 구식처럼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러닝타임이 141분으로 스릴러라는 장르치고는 너무 길다는 느낌이 들지요.
ⓒ Distributors Corporation of America(DCA). All Rights Reserved.
실제로 초반 1/3의 전개는 좀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별볼일 없는 중남미 우루과이의 어느 마을에 하루하루를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룸펜들의 지루하고도 궁색한 삶을 조명하고 있거든요. 미래가 없는 이들, 어디에선가 무슨 사정에 의해 이곳에 모여들지만 결국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는 한심한 인생들을 보자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루한 일상을 되풀이 하는 오늘날의 샐러리맨들과 특별히 달라보일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아무튼 영화의 초반부는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인물들의 캐릭터 묘사에 상당 부분을 할애합니다.
주인공 마리오(이브 몽탕 분)도 이러한 부랑자 중 한 사람으로서 식당 여급인 린다(베라 클루조 분)에게 추근대는 건달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세기를 타고 온 조(찰스 바넬 분)가 도착합니다. 조는 과거에 꽤나 잘나갔던 모양이지만 그 역시 몰락한 퇴물로서 결국 이 마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마리오는 호탕한 조의 성격에 이끌려 어느덧 절친한 사이가 됩니다.
ⓒ The Criterion Collection. All Rights Reserved.
관객들이 다소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영화는 본격적인 전개로 들어갑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미국인들이 개발하는 유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 것이죠. 다급해진 유전 담당자는 거액을 걸고 화재 진압을 위한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을 운반할 트럭 운전수 4명을 모집하게 됩니다. 조금만 충격이 가해져도 폭발하는 위험천만한 니트로글리세린이지만 팔자를 바꾸기에 충분한 거금에 눈이 먼 부랑자들은 목숨을 건 이번 일에 자원합니다.
이제 영화는 선발된 4명의 사나이들이 두명씩 조를 이루어 니트로글리세린을 운반하는 여정을 비춰주는데요, 이렇게 보면 사실 내용이야 엄청 단순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세계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스릴러물로 극찬받는 이유는 마치 관객이 니트로글리세린을 운반하는 것처럼 미칠 정도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몰입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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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흑백영화로서 영화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초보적인 수준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시겠지만 [공포의 보수]는 그러한 선입견 따위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리고 마음껏 관객들을 요리해 나갑니다. 특히나 클루조가 사용한 쇼트컷의 활용은 기발한 상황 설정과 함께 기술적인 부족을 완전히 커버하고도 남는데요, 영화속 후진장면의 아슬아슬함은 아마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수명이 5분은 줄어들었다고 느끼실 정도로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서스펜스의 백미입니다.
프랑스 명배우 이브 몽탕이 처음으로 정극 연기에 도전해 건들건들한 룸펜역을 소화한 것과 비굴하면서도 교활한 퇴물 사업가 조의 캐릭터를 리얼하게 보여준 찰스 바넬의 콤비네이션은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원래는 조 역에 명배우 장 가뱅이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거절하는 바람에 바넬에게 배역이 돌아갔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의감 넘치는 이미지의 장 가뱅 보다는 바넬 쪽에게 훨씬 걸맞는 역할이었지요. 아,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화의 유일한 히로인인 린다 역의 베라 클루조 인데요, 이름으로 짐작하셨겠지만 H.R 클루조의 부인으로 상당한 미인입니다. 이 작품 말고도 남편과 3편의 작품을 함께 만들었지만 그 3편이 그녀의 출연작 전부가 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고작 4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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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보수]는 서스펜스 영화로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그 결말에 있어서도 다른 헐리우드 영화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프랑스 영화의 허무주의적 색체가 물씬 풍긴다는 면에서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스포일러상 말할 수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면, '아, 이것이 미국 영화와 프랑스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로구나' 하는 점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비록 반세기가 지난 작품이지만 [공포의 보수]만큼 손에 땀을 쥐는 영화는 근래에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역시 잘만든 작품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랄까요. 어찌보면 이런 작품을 한국에서 접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축복임과 동시에 수치스런 일입니다. 세계의 걸작 영화만을 복원하기로 유명한 미국의 크라이테리언사의 오리지널 판본을 세일 DVD란 회사에서 무단으로 복제해 완전 똥값에 팔리고 있거든요. 5장에 1만원 하는 저가판 DVD를 판매하는 가게를 지나가신다면 꼭 들리셔서 한 개 구입해 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불법 복제품을 권하기가 차마 민망해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3천원도 안되는 가격에 구입하기엔 너무나도 과분한 퀄리티의 작품이니까요. 혹시라도 구입하신다면 정말 땡잡았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P.S
1.클루조는 원래 이 작품을 스페인에서 로케이션 촬영하길 원했으나 이브 몽탕과 그의 아내 시몬느 시뇨레가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스페인에서는 촬영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촬영을 했답니다. 촬영은 총 9주 안에 완결지을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런 기상이변으로 인한 폭우, 클루조 감독의 골절상에 이은 부인 베라의 입원, 제작비 500만 프랑의 추가 지출 등 갖은 악재 덕분에 촬영이 무려 6개월간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와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동시에 수상한 최초의 프랑스 영화로 기록되게 됩니다.
2.흥미롭게도 이브 몽탕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이 '마리오', 그리고 극 중 그의 룸메이트 이름은 '루이지'입니다. 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그 마리오와 루이지랑 똑 같지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3.제가 갑자기 이 작품을 소개한 이유는 8월 24일부터 개최되는 '충무로 국제 영화제'에 [공포의 보수]의 상영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놈의 리핑판 DVD를 보는게 늘 찜찜했었는데 이제서야 제대로 된 스크린에서 '정식으로' 이 영화를 보게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는 구만요. 극장에서 보실분은 8월 25일과 8월 31일 중앙시네마 5관에서 20:00에 상영되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거든요.
4.H. P. 러브크래프트의 동명소설이 있긴 합니다만 이 작품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조르주 아르노입니다.
5.아시는 분은 아실테지만 이 작품은 1977년,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리메이크 작품만큼은 꼭 리뷰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본문에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대하세요.
6.이 작품에 대한 하로기 님의 웹툰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가기)
* [공포의 보수]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The Criterion Collection. All Rights Reserved.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공포의 보수 미국판 포스터(ⓒ Distributors Corporation of America(DCA).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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