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고전열전(古典列傳) : 고지라 - 슬픔을 간직한 괴수영화의 걸작

페니웨이™ 2010. 1. 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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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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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력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만 가난했던 어린시절, 흑백TV로 AFKN에서 아주 감동적인 영화 한편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건 몰라도 도심을 들쑤시던 괴수 한 마리가 물속에서 옥시즌 디스트로이어의 위력앞에 서서히 녹아내리는 장면만큼은 또렷히 기억하고 있지요. 희한하게도 그 괴수는 나쁜놈임이 분명한데, 죽음의 순간에서 연민을 느꼈던 건 왜일까요. 그 작품의 이름은 [고지라]였고, 이 영화가 (당시에는 금기시 되었던) 일본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꽤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물론 그때 제가 접한 [고지라]는 일본에서 개봉한 오리지널 버전이 아니라 레이몬드 버의 나레이션이 첨부된 북미 버전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실은 [고지라]가 일본의 원폭 트라우마를 형상화한 영화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죠.

[고지라]가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적이 한번도 없었음에도(한국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고지라 시리즈는 [고질라 2000]이 유일합니다) 필자의 유년기때 고지라를 모르던 아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능력개발사에서 발행한 초특급 베스트셀러 '괴수공룡백과'의 영향이 크긴 했죠. 나중에 출간된 다이나믹 콩콩의 '괴수군단 대백과'에서는 고지라를 '용가리'로 번안해 놓았던 기억도 생생하군요.


 

ⓒ 능력개발. All rights reserved.

고지라를 알리는데 널리 일조한 국민학생들의 필독서 '괴수공룡백과'


ⓒ 다이나믹 프로 . All rights reserved.

다이나믹 콩콩 미니백과 시리즈인 '괴수군단 대백과'. 고지라를 굳이 용가리로 번역한 센스가 특징이다.


아무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음에도 신드롬을 일으킨 [고지라]였으니, 이 작품을 정식 개봉한 나라들에서는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겠는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사실 지금 기준으로 [고지라]를 본다면 이 영화를 '괴수영화의 걸작'이라고 표현하기가 조금 망설여지는 건 사실입니다. 특수효과도 조악하고, 이야기의 전개도 허술한 점도 눈에 띕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일본내 특촬물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고, 이후 20여편에 이르는 초장수 시리즈물이 되었다는 점을 볼때 [고지라]는 분명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 Toho Company. All rights reserved.


일본열도를 공습하는 고지라는 원폭실험에 의해 깨어난 고대의 생명체입니다. 인간의 눈을 피해 해저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던 그를 깨운건 다름아닌 인간인 것이죠. 고지라가 난동을 피우긴해도 엄연히 말하자면 근본적인 피해자는 고지라입니다. 아마 제가 어린시절에 고지라의 죽음을 안타깝다고 느낀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해도 본능적으로 고지라가 피해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다면 [고지라]에서 진짜 나쁜 쪽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일본은 아닙니다. 원폭실험의 당사자가 일본이라는 언급은 나오지 않을뿐더러 일본은 고지라에 의한 희생자일 뿐이거든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 미국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지라]가 개봉되기 몇달 전, 미국의 원폭투하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된 일본인들을 또 한번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1954년 3월 1일, 미국은 마샬제도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강행하는데 당시 마셜제도 비키니 산호섬으로부터 북동쪽 100마일 거리에서 원양작업을 하던 일본어선 제5 후쿠류마루가 수소폭탄의 낙진에 의한 영향에 노출되어 선원들 전원이 방사능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 겁니다. 그것이 이른바 '제5 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 사건’ 입니다.

영화 [고지라]는 바로 이 사건에 모티브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이 사건으로 [고지라]의 제작자 타나카 토모유키는 핵에 대한 일본인들의 공포심을 재확인하게 되었고, 태평양 핵실험에 대한 날선 시각의 풍자적 함의를 접목시킨 괴수물의 원형을 고안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헐리우드의 B급 괴수물 [심해에서 온 괴물 Beast From 20,000 Fathoms]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요.

ⓒ Warner Bros. All rights reserved.


어쨌거나 영화속 고지라의 습격은 실은 '인재'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무력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제 고지라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젊은 과학자 세리자와 다이스케가 개발한 신물질인 옥시즌 디스트로이어를 사용하는 것인데, 자신의 발명이 무기화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던 그는 결국 개발 자료를 모두 불태우고 자신도 고지라와 함께 장렬히 산화합니다. 단순한 오락물에 그칠뻔한 [고지라]를 돋보이게 만든건 바로 이 슬픈 엔딩에 있습니다.

비록 [고지라]가 2차세계대전의 원흉중 하나였던 일본인 스스로를 일종의 원폭에 의한 희생자처럼 포장하는 찜찜한 작품이긴해도 영화적인 완성도만을 놓고보면 당시로선 파격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지라]는 '현존하는' 일본 최초의 거대 괴수물이자, 블록버스터였고, 특촬물의 원형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 Toho Company. All rights reserved.


특히 이 작품이 보여주는 기술적인 측면은 신선한 충격이었는데요, 당시 헐리우드 괴수물의 대세는 [킹콩]에 사용되었던 스톱모션 기법이 주를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특수효과 감독인 츠부라야 에이지는 자신들이 처한 환경속에서 스톱모션 기법을 쓰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스턴트맨인 나카지마 하루오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 Toho Company. All rights reserved.

'우리가 스톱모션 기법을 사용한다면 완성까지 7년이 걸릴 거요. 당신을 고용하는 이유는 [고지라]를 3개월안에 끝내야하기 때문이오.'


결국 나카지마 하루오는 고질라 슈트를 뒤집어 쓴채 열연을 펼쳤고, 여기에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이 배어있는 미니어처가 빛을 발하며 사실적인 괴수의 움직임을 스크린에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시대를 역행하는 슈트메이션(Suitmation) 기법으로 오히려 괴수물의 활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지요.

한편 [고지라]는 미국에서도 개봉되었는데, 약 20분간의 러닝타임을 줄이고 대신 레이몬드 버의 등장씬을 교묘히 편집처리한 이 작품은 사실상 오리지널판에 비해 완성도가 엄청 떨어집니다. 레이몬드는 이 편집본에서 나레이션과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을 단 하루만에 찍는 살인적인 일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초죽음이 된 가운데서 촬영을 마쳐야 했고, 그 무리한 촬영의 결과는 영화상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괴수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서서히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스릴러적 기법이 돋보였던 일본판의 오프닝과는 달리 북미판은 이미 사건이 종결된 시점에서 레이몬드 버의 회상으로 넘어가는 이른바 액자식 구성을 채택하고 있어서 오리지널의 긴장감을 모조리 증발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던 겁니다.

ⓒ Distributors Corporation of America (DCA). All rights reserved.


뭐 그럼에도 미국내에서 조차 [고지라](미국명: 고질라 Godzilla)는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키게 되었고 심지어 '맘질라(momzilla 막무가내인 엄마를 가리키는 속어)'같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고지라는 2004년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는 영예도 누리게 되는데요, 이는 일본의 캐릭터가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유일한 케이스였습니다.

[고지라]는 1998년, 우여곡절끝에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에 의해 [고질라]로 리메이크되었는데요, 특수효과와 스케일은 월등히 향상되었지만 예전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은 시대에 걸맞는 감수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즈가 문제다 Size Does Matter'라는 캐치프라이즈의 [고질라]였지만 문제는 고지라의 사이즈가 아니라 주제의식이었던 거죠.

ⓒ Centropolis Film Productions/TriStar Pictures/Toho Film (Eiga) Co. Ltd. All rights reserved.


이렇듯 [고지라]는 괴수물이 일본 영화계의 주류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슈트메이션이라는 일본 특촬물의 전통을 확립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후 196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괴수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만큼 많은 괴수영화가 제작되었고, 고지라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시리즈를 낳게 되었죠.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품에서 고지라가 철저하게 인간의 적으로 묘사된 것에 비해 VS 시리즈로 가면서 인간의 편에 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P.S:

1.아는분도 있겠지만 고지라는 원래 토호사의 스탭 중 한사람의 별명이었습니다. 고릴라와 고래(일본어:쿠지라 クジラ)를 합성한 것이 바로 '고지라'였지요. 이 분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군요.

2.어찌보면 [고지라]의 일등공신은 고지라의 탈바가지를 쓰고 열연한 나카지마 하루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독특한 고지라의 몸동작으로 자연스런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고지라]는 그야마로 어린이 인형극 수준이 되어 버렸겠지요. 그는 무려 12편의 [고지라] 시리즈에서 고지라 역을 맡았으며 그 외 다른 괴수물에서도 슈트액터로서 맹활약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 [고지라]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Toho Company.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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