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고전열전(古典列傳) : 천국과 지옥 - 계급의 양극화와 인간성 말살의 함수관계

페니웨이™ 2009. 10. 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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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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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는 한 시간에 한 건 꼴로 유괴사건이 발생한다. 그들 중 70%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영화 [맨 온 파이어]의 첫 장면에 뜨는 자막입니다. 아이를 유괴당한 부모의 마음. 당사자 외에 그 슬픔과 충격을 가늠하기란 불가능할 겁니다.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들은 제법 많은데,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에서는 하도 쳐대서 가슴 부근이 시커멓게 멍든 김남주의 모습을 통해 자녀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미지화 시키기도 했지요.

또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은 누나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착한 유괴'를 계획하다가 일이 꼬여 파멸에 이르는 사건을 담았는가 하면, 론 하워드 감독의 [랜섬]은 멜 깁슨이라는 배우의 이미지에 맞게 유괴된 아이의 아버지가 공개적으로 현상금을 내건다는 설정으로 강한 부성애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또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어떤가요. 아이를 유괴해 살해한 범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독특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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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uchstone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유괴범에 대한 아버지의 선전포고, [랜섬]



이제 소개할 [천국과 지옥]은 세계적인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몇 안되는 현대극으로서 지난번 소개한 [들개]와 함께 리얼리즘 수사극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들개]가 다분히 일본 전후의 자화상을 은유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면 [천국과 지옥]은 유괴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양심 사이에서의 내면적 갈등을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시대극 뿐만 아니라 현대물에 있어서도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은 걸작입니다.

그럼 내용을 잠시 소개해보겠습니다.

영화는 신발회사의 중역들이 회사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마찰을 빚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토시로 미후네가 맡은 곤도라는 인물은 은밀한 물밑작업으로 회사의 주식을 매수해 경영권 확보에 나섭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곤도의 계획대로 되기 직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다름아닌 자신의 외동아들이 유괴된 것이지요. 유괴범이 요구한 돈은 3000만엔. 평상시라면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겠지만 집까지 저당잡혀 어렵게 주식을 매입하게 된 곤도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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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ho Company. All rights reserved.


그럼에도 아들을 위해서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며 흔쾌히 그 돈을 내려한 곤도는 이윽고 유괴된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함께 놀고 있던 운전사의 아들임을 알게됩니다. 이제 곤도는 태도를 뒤바꾸어 몸값을 한푼도 낼 수 없다고 버팁니다. 이를 두고 아내는 곤도를 비난하게 되고 운전사는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거기에 자신이 실수로 다른 아이를 유괴했다는 걸 알게된 유괴범도 상관없으니 곤도가 몸값을 내야한다고 요구합니다. 평생에 걸친 부와 업적을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해 포기하느냐, 아니면 예정대로 회사 주식을 매입해 성공가도를 달릴것인가.. 곤도의 근심은 깊어만 갑니다.

'천국과 지옥'이라 해서 기독교적 교리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실테지만 영어 제목은 'High and Low'로서 다분히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제목은 신분의 고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요, 영화상에서 곤도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출세한 사업가로서 이른바 상류사회의 사람이지만 유괴범은 (유괴범의 실제 직업을 보면 참 의아한 일이긴 합니다만...)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지옥'이라고 말할만큼 밑바닥 인생에 가깝게 그려집니다. 실제로도 곤도는 이른바 업타운에 대저택을 짓고 살지만 범인은 철길옆의 허름한 쪽방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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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곤도가 처한 상황을 빗댄 것으로서 회사의 경영권 장악이라는 일생일대의 대역전극을 눈앞에 둔 천국과도 같은 상황에서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길바닥에 나앉을지도 모르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탐정소설가인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중 '왕의 몸값 King's Ransom'을 바탕으로 구성된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유괴사건이라는 표면적인 갈등구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전후 일본의 자본주의 체계로 생겨난 자본가와 서민의 계층적 양극화에 대해 제법 진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데, 가령 같은 부모이지만 몸값 지불능력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운전사 아오키와 고용인인 곤도의 대비, 그리고 가난한 유괴범과 부유한 곤도의 대비를 통해 그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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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들개]에서 이미 보여주었던 형사들의 탐문과정과 수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후반부의 리얼리티는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전반부가 몸값의 지불여부를 놓고 갈등하는 곤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후반부는 원작에서의 87분서 형사들처럼 수사관들의 집요한 추적 과정에 중점을 둡니다. 이는 다분히 1970년대 주류를 이루었던 헐리우드의 형사영화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프렌치 커넥션]의 도일 형사나 [더티 해리]의 해리 켈러한 같은 1인 영웅주의의 관점과는 달리 팀을 이루어 수사를 진행하는 현실적인 수사극의 진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시절 이만큼의 리얼리티를 부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로자와 아키라에게는 거장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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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전성기 때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거의 끝부분에 위치하는 작품입니다. 구로자와 감독은 단역배우에게도 한달간의 연기 연습을 시키고 촬영에 임하게 하는 등 지독한 완벽주의를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제작방식은 곧 제작비의 상승과 연결될 수 밖에 없었고 극장영화의 쇠퇴와 TV의 보급 때문에 경영란을 겪게된 프로덕션으로부터 배척당한 구로자와는 급격한 하락기를 맞이하며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등 심한 난관을 겪게 됩니다. 결국 그는 러시아의 자본으로 완성된 [데수루 우자라]를 찍은 후, 평소 그를 동경하던 프란시스 F.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의 도움으로 [카게무샤]를 완성하면서 후기작품들을 내놓게 됩니다.

한편 구로자와 아키라의 페르소나인 토시로 미후네의 화면 장악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반부는 오로지 그를 위해 짜여진 것이라 할만큼 극을 이끌어가는 캐릭터의 몰입도가 상당합니다. 미후네 특유의 과장되고 마초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연기패턴은 이번 작품에서 야심만만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거듭나 유괴범의 요구에 맞서는 고독한 가부장적 가장의 모습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구로자와 아키라-토시로 미후네의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는 차기작 [붉은수염]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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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은 2시간 2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이렇다할 액션씬 하나 없을 정도로 절제된 연출을 보여주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의 얼개가 촘촘한 영화입니다. 물론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일본 전후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전통적인 가치관과 도덕적인 양심이 쇠락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읽어낸 구로자와 아키라의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영화야말로 걸작이요, 명작 아니겠습니까?


P.S:

1.[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 감독은 '시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유괴는 물론 나쁜 범죄다. 그러나 아이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다면 모두에게 피해가 안 가는 괜찮은 범죄라고 생각하는 놈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로 만들어 볼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구로자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을 보고는 포기했다. '유괴영화는 이제 아무도 못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를 능가하는 영화는 만들지 못 하더라도 그와 다른 영화는 만들 수 있지 않나...생각했다."

2.일본에서 [살인의 추억]이 개봉된 직후 [천국과 지옥]의 리메이크 제안을 받은 봉준호 감독 역시 부산 씨네마테크에서 상영했던 [천국과 지옥]을 소개할 당시 '[천국과 지옥]의 리메이크를 의뢰받은 적이 있는데, 거장 구로사와 감독과의 맞대결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 거절했다'고 토로했지요.

3.지난번 [들개] 리뷰에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들개]의 영향력하에 있다고 표현한 부분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분이 있었는데, 그 취지는 선행작인 [들개]가 취한 리얼리즘 형사물의 영향력을 상기시키기 위해 말씀드린 것이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로 봉 감독 자신이 [살인의 추억]과 관련해 직접 언급한 작품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과 '프롬 헬'이라는 영국산 코믹스, 그리고 바로 이 [천국과 지옥]입니다.

4.결국 이 작품은 [졸업]의 마이크 니콜스가 감독을 맡아 현재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진행중입니다. 개봉 예정일은 2010으로 일단 되어있긴한데, 글쎄요... 헐리우드 리메이크라면 기대치가 떨어지는게 사실입니다.

5.구로자와 아키라는 독일의 표현주의 감독인 프리츠 랑의 첫번째 유성영화 [M]을 보고 난 뒤에 유괴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M]은 '뒤셀도르프의 흡혈귀'라 알려진 유명한 아동연쇄살인사건에 모티브를 둔 범죄물로 알프레드 히치콕을 비롯한 수많은 거장들의 극찬을 받은 고전입니다. 언제한번 고전열전에서 다뤄보도록 하죠.

6.하마터면 잊을 뻔 했군요. 이 작품은 2007년에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에 의해 TV용으로 리메이크 된 바 있습니다. 사토 코이치가 곤도 사장역으로, 츠마부키 사토시가 유괴범으로, 아베 히로시가 형사로 각각 등장해 막강한 캐스팅을 선보였습니다만 원작을 뛰어 넘기엔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네요.

ⓒ Toho Company/Asahi TV.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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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랜섬(ⓒ Touchstone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천국과 지옥 TV판(ⓒ Toho Company/Asahi TV.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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