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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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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이었던가... 누군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재밌는 영화를 고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참 난해한 질문이긴 했습니다만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던 터라, 영화를 선택할때 실패율을 낮추려면 '형사물'을 고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질문했던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말하길, '역시, 형사영화는 대부분 재미있더라'는 얘길 하더군요. 뭐 제 나름대로의 편협한 제안이긴 했습니다만 사실 지금도 형사물은 최소한의 재미를 보장해 주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요즘은 하도 형사물 중에서도 말초적인 신경만을 자극하는 저질 헐리우드 영화들이 판을 쳐서 그런지 볼 만한 형사영화가 점점 줄어들고 있더군요. 예전과는 달리 과격한 폭력만 넘쳐나고 말이죠.

볼 만한 형사영화가 없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아예 고전영화 중에서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가령 1949년작 [들개]는 벌써 반세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진리임을 입증하듯 뛰어난 내러티브를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의 초기작 중 하나인 [들개]는 아직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등으로 전성기를 누리기 이전에 구로자와 감독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뜻깊은 작품인데요, 이보다 먼저 나온 줄스 다신 감독의 [네이키드 시티]에 비견될 정도로 사실적인 탐문과정을 보여주는 형사물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스토리 소개를 해볼까요? [들개]는 개시키가 헥헥 거리는 인상적인 오프닝으로 시작합니다.

미칠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여름날, 강력계 신참 형사인 무라카미(토시로 미후네 분)는 불쾌치수가 치솟는 만원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만 자신의 콜트 권총을 소매치기 당합니다. 형사가 권총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수치심, 그리고 그 권총이 다른 범죄에 쓰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무라카미는 백방으로 권총의 행방을 찾아나서지만 번번이 장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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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ho Company/ The Criterion Collection.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동료 형사의 도움으로 오랜 탐문끝에 불법 권총밀매 현장을 급습하게 되는데, 조급한 나머지 그만 밀매상의 끄나풀을 붙잡는 대신 실제 판매상으로 부터 권총을 빌려간 용의자는 놓쳐 버리고 맙니다. 사건은 점점 꼬이게 되어 급기야 부상자가 발생한 무장 권총강도 사건에 자신의 콜트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라카미는 더욱 초조함과 죄책감을 빠져들게 되지요.

권총강도 사건의 담당을 맡은 배테랑 형사 사토(시무라 다카시 분)와 팀을 이룬 무라카미는 수사과정에서 내내 자책감에 시달리고, 또한 자신의 권총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게 된 범죄자에 대한 동정심도 갖게되는 등 복잡한 심경을 느끼게 되는데요, 이 와중에서 범인은 드디어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남은 권총의 총알은 5발. 앞으로 어떤 일이 더 발생할지 모로는 상황에서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된 무라카미는 용의자가 왜 첫 번째 강도사건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면서 더욱 혼란에 빠집니다. 과연 무라카미는 자신의 콜트를 무사히 되찾고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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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ho Company/ The Criterion Collection. All rights reserved.


'권총을 소매치기 당한 형사'라는 상황이 주는 아이러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2차 대전 직후의 사회적 혼란을 독특한 시점에서 바라본 구로자와 아키라의 범상찮은 솜씨는 시대를 초월해서 대단한 흥미를 자아냅니다. 특히 찌는듯한 일본의 무더위라는 계절적 악조건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의 리얼리티는 요즘 영화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실성이 돋보이죠. 이러한 사실적 표현은 끈적거리는 날씨처럼 템포가 느리기 때문에 요즘의 스피디한 형사물에 길들여진 관객은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들개]는 기본적으로 두명의 형사가 페어를 이룬 버디물이지만 액션과 추리에 중점을 둔 오락영화와는 약간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형사물의 틀 안에서 전후 일본 사회를 특징짓는 인물들을 모아놓은 듯한 군상극에 가까운데요, 영화의 주된 흐름을 이끄는 무라카미는 패전국의 트라우마를 순수한 열망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지나친 죄책감에 시달리는 지극히 양심적인 새시대의 인물을, 사토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흑과 백의 극단이 아닌 합리적으로 판단하려는 (어찌보면 자기 변호에 가까운 듯한) 보수적인 인물을, 권총강도를 일으키는 범인은 패전국의 멍에와 함께 모든 것을 주변의 상황 탓으로 돌리면서 자멸해 가는 인물을 각각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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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ho Company/ The Criterion Collection. All rights reserved.


이 작품은 형사와 범인의 추격전이라는 설정을 담고 있지만 선과 악의 개념에 있어서는 극히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 관객에게서 그 해답을 유도하려 합니다. 만약 무라카미가 권총을 잃어 버리지 않았다면 권총 강도 사건의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까? 혹은 용의자와 밀매상의 접선 장소에서 무라카미가 밀매상을 체포하는 모습을 지켜본 용의자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사건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그런점에서 잘못의 원인은 범인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라카미에게 있는 것일까? 와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사색거리를 제공합니다.

[들개]를 만들 당시 구로자와 감독은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프랑스의 유명한 추리 소설가 조르주 시므농(Georges Simenon)의 작품들에 매료되었고 실제로 [들개]는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입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말하길,

'나는 완벽한 선이나 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중략).... 철저하게 악독한 사람들은 돌연변이 같은 존재나 특별한 경우일거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나는 선과 악이 모든 인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 BBC와의 인터뷰, [라쇼몽]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DVD의 커멘터리 중에서


 

라고 말하면서 이 작품이 선과 악의 존재론적인 물음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담은 작품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한편 옛날 작품임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카메라 워크는 테크니션으로서의 구로자와 아키라를 다시금 생각나게 해 줍니다. 사소한 정물 하나하나를 캐치해 내는 꼼꼼한 촬영과 추격전의 백미는 이후에 제작된 수많은 영화들에서 오마주되고 있습니다. (가령 추격전 시퀀스는 [프렌치 커넥션]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라스트 씬의 범인과 진흙탕에서 뒹구는 장면은 [블랙 레인]의 라스트 씬과 유사하다)  개인적으로는 소매치기의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여자가 무라카미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시퀀스가 참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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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ho Company/ The Criterion Collection. All rights reserved.


구로자와 아키라의 페르소나인 토시로 미후네는 정말 대단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주로 시대극에서 구로자와 감독과 손발을 맞춘 그는 이번 작품에서 특유의 굵직한 남성적 매력을 물씬 풍기는 강직한 형사역으로서 웬만한 헐리우드 스타보다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확실히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배우입니다. 요즘 배우들은 이런 카리스마를 풍기는 배우가 드물죠.

실제로 [들개]에서 표현되어지는 다양한 메시지와 장점들은 이 한편의 리뷰로 압축하기엔 벅찬감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전영화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꼭한번 감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국내에도 2900원짜리 초저가 DVD로 정식 출시가 되어 있는데요, 역시나 미국 크라이테리언사의 소스를 무단으로 갖다 쓴 무판권 DVD입니다. 따라서 가격대비 퀄리티면에서는 세계 최고지만 참 양심적으로는 거시기하군요. 쩝.


P.S:

1.대부분의 걸작이 그러하듯 이 작품도 1973년 모리사키 아즈마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원작의 아우라를 뛰어 넘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2.최근의 한국영화들에서도 [들개]의 영향을 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 같은 형사물은 어떤면으로 [들개]의 영향력에서 크게 자유로울 순 없다고 봅니다. 물론 심하게 변주가 되긴 했지만요.



* [들개]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Toho Company/ The Criterion Collection.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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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리미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숨은 요새의 세 악인만 봐서 그런지....


    말끔한 정장에 수염 없는 미후네 토시로는 어색 그 자체 !!!

    2009.09.30 10:48 신고
  2. Terminee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페니웨이님이 소개해주시는 작품들 중에 한 번 보고 싶은 건 많은데
    게으른 데다가 원래 영화 보는 데 그렇게 시간을 많이 쓰는 편도 아니라서
    다 챙겨보기는 참 어렵네요. 이 작품도 보고 싶긴 한데... ^^a

    P.S. 조르주 시느몽(Georges Simenon)이라고 쓰셨는데
    불어는 모르지만 한글 발음 써 놓으신 걸로 봐서는 Sinemon이 아닐까 싶군요.

    2009.09.30 11:20 신고
  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봉준호가 살인의추억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영화는
    들개가 아니라 일본영화 복수는나의것이죠

    2009.09.30 13:23 신고
    • 페니웨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살인의 추억]이 일본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봉준호 감독의 언급은 저로선 들어본 적이 없는 사실이로군요. 설사 그말이 맞다한들 [복수는 나의 것]은 범인의 입장에서 범행행각을 묘사한 작품으로 형사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건 [들개]의 리얼리즘적 표현이 후대 형사물에 미친 테크닉적인 부면입니다.

      2009.09.30 20:51 신고
  4. 무비조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생적으로 일본영화를 싫어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지금 받아 놓은 비디오하고 DVD도 몇편되는데 언제 보고 글 적을지 모르겠네요...
    ㅎ 월하의 공동묘지는 이전거 고쳐서 다시 적기는 했습니다만...(이전 글이 워낙 개판이어서 다시 고친건 완전 새로운 글이긴 했습니다...)

    음 일본영화 명작도 보긴 봐야되는데.. 요상하게 일본영화는 정말
    저하고 상극이란 생각이 아주 자주듭니다 쿨럭....

    2009.10.01 00:26 신고
  5. 이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 고전 수사 펄프픽션으로 유명한 XXX분서 시리즈중 하나를 따서 일본으로 설정을 바꾸고 구로자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도 있습니다. 큰 도박성 투자를 하려고 전재산을 때려 넣은 사장님이 운전사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오인해서 유괴한후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그 금액이 투자하려는 금액에 필적하는) 범인과 대면하는 이야기죠. 원작은 형사들이 주인공인 수사물이지만 영화는 사장의 시각에서 전체를 그리고 있지만요.

    ps: 즐거운 명절되세요.

    2009.10.01 09:17 신고
    • 페니웨이™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 그래도 그 작품을 다음쯤에 소개할까 합니다.

      2009.10.01 11:06 신고
    • rodi  댓글주소  수정/삭제

      뭔가하고 읽어보니 천국과 지옥이군요. ^^ 츠마부키 사토시가 나오는 tv특집극 리메이크판을 먼저 보고 원판을 봤는데 ㅠ.ㅠ 기억을 리셋하고 싶었습니다. 원판을 먼저보고 리메판을 봤어야 하는데.

      여튼 일드 춤추는 대수사선에서도 언급이 되고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2009.10.02 10:46 신고
  6. 나이트세이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접해 본 일본 영화는 하나 같이 저에게는 부담스러운 오버를 담고 있기에 약간의 편견이 생겼습니다. 고전이든 현대물이든 간에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미리 그런 생각이 깔려 있어서인지 몇 편 보지는 못했지만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그래도 이 영화는 존재 자체도 몰랐는데 끌리네요. 함 봐야겠습니다.

    추석 재미있게 보내세요. ^_^ /

    2009.10.01 15:34 신고
  7. rodi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들개.... 저는 왠지 미후네토시로의 연기보다 시무라타카시의 느긋한 연기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총을 잃고 초조해 하는 신참과 달리 만고강산임에도 노련하게 수사하는 모습이 어딘지 대비가 되서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2009.10.02 10:51 신고
  8. 스파이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들개는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라쇼몽>은 일부나마 본 적이 있네요.
    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님이 시점을 설명하시면서 보여주셨던;;
    그 때 구로자와 아키라라는 이름을 들었는데,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무척 반갑군요^^

    덧:라쇼몽은 하필 그 부분을 배울 때 서울에서 데니 안이 나오는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는데,
    자금이 딸려서........ㅠㅠ 뭐 그런 슬픈(?) 기억도 있답니다;;

    2009.10.03 18:53 신고
  9. 트래비스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처럼 아는 영화가 나왔네요. 구로사와 아키라는 저에게 일본영화는 전부 만화같은 유치뽕짝인줄만 알았던 편견을 깬 감독이었습니다. 일본영화사를 살펴보니 대단했더라구요. 개인적으로 일본에 구로사와가 있다면 우리나라는 김기영 감독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데 김기영감독 작품 계획도 있으신지요? 요새 한창 관심을 갖고있거든요^^

    2009.10.05 13:24 신고
  10. 붉은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로사와 아키라의 후기 대작들보다는 해외에서 주목받기 전인 이 시기의 작품이 보다 제 취향에 맞습니다.
    이 영화는 대학교 2학년 때인가 보았는데, 사실 그때만 해도 <프렌치 커넥션>을 모방한 부분이 있네,
    라고 생각해버렸지요.ㅎㅎㅎ (영화 제작년도 전후 관계는 필름 상태만으로도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ㅋ)

    일본 영화가 구로사와 영감님 때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기타노 다케시 외의 감독에게서는 그런 가능성이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몇년간 일본 영화는 소품들은 좋지만, 대작들을 하나같이 엉망이었기에...(특히 시대물들 안습...)

    2009.10.08 15: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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