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36
영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다보면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의 영화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당시에는 UIP직배사의 등장으로 인해 헐리우드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할 때였고, 이에 더해 한창 황금기를 맞이하던 홍콩영화의 범람으로 인해 극장가는 그 어느때보다도 풍성한 작품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VTR의 보급도 한 몫을 했지요. 많은 가정에서 저렴한 가격에 영화를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긴 요즘은 인터넷에서 거의 공짜로 다운받아 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그 시절 한푼 두푼 모아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감상한 영화들이 더욱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품을 이용합시다!)암튼 오늘은 그 때 당시에 아주 재밌게 보았던 괴작 한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말 무렵은 홍콩영화의 황금기였습니다. [영웅본색], [첩혈쌍웅]을 비롯해서 각종 듣보잡 영화들이 동네 3류극장은 물론 개봉관들을 싹쓸이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지요. 물론 주류를 이루었던건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였지만, 그 밖에도 꽤 다양한 장르의 홍콩영화가 선을 보였습니다. [장단각지연]같은 코믹물도 있었고, [천녀유혼]같은 환타지물, [가을날의 동화]처럼 멜로물도 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이런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 속에서 유독 특이한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것이 오늘 소개할 [철갑무적 마리아]라는 작품입니다.[철갑무적 마리아]는 1988년작으로서 당시 헐리우드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로보캅]의 성공에 고무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아류작 같은 영화입니다. 국내 개봉당시에도 '홍콩의 미녀 로보캅'이라는 선전문구를 민망할 정도로 강조해서 대대적인 홍보를 한 것이 인상적이었지요. 이처럼 노골적인 [로보캅]의 설정차용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당시로선 꽤나 흥미진진한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보캅] 이전에 이 작품은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어떤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바치고 있는데요, 다름아닌 프리츠 랑 감독의 1926년작, [메트로폴리스]가 그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메트로폴리스]는 세계 최초로 '로봇'을 등장시킨 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한 로봇의 이름은 '마리아'로서 영화속 로봇의 시초이자, 여성형 로봇이라는 특징을 지녔는데요, 네 바로 [철갑무적 마리아]의 '마리아'는 [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에 대한 오마주인 셈입니다. 로봇의 전체적인 아웃라인도 매우 흡사하지요.
그럼 먼저 [철갑무적 마리아]의 간단한 스토리 라인을 살펴봅시다. '영웅당'이라는 수수께끼의 범죄조직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경찰들이 사건 현장에 총출동했다가 '선봉 1호'라는 거대 로봇을 맞닥드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범인들은 '선봉 1호'를 이용해 도시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욕에 불타 오르지요. 이에 더해 보스의 애인이자 부두목인 '마리아'를 복제해 만든 궁극의 로봇 '선봉 2호'까지 완성시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합니다.한편 경찰에서 무기개발을 담당하는 일명 '배추머리'라는 과학자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취객인 '위스키'라는 사람을 구해주게 됩니다. 이 위스키는 사실 '영웅당'의 조직원인데 마리아가 보스에게 맘을 빼앗긴 것에 상처를 받아 조직에서 나왔다가 배추머리의 도움을 받게 된 겁니다. 이 사실을 입수한 '영웅당'은 위스키가 조직을 배신하고 경찰에게 내부정보를 누설하는 것으로 판단, '선봉 2호'를 파견해 배추머리와 위스키를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선봉 2호'는 뜻하지 않은 고장으로 임무달성에 실패하게 되지요.
이렇게 입수한 '선봉 2호'는 배추머리에 의해 재 프로그래밍되어 이제 배추머리와 위스키를 위해 싸우게 됩니다. 위스키 제거에 실패한 '영웅당'에서는 마리아와 '선봉 1호'를 직접 파견하게 되고 이제 위스키와 배추머리 콤비는 이 악당들의 기습에 맞서기 위해 '선봉 2호'를 가동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철갑무적 마리아]에서는 무척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는데요, 먼저 [첩혈쌍웅]의 히로인으로 당시 필자가 왕조현이나 종초홍 보다도 좋아했던 엽청문이 마리아와 선봉 2호의 1인2역을 담당하는 타이틀 롤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비중있는 조연으로서는 최근 홍콩 영화의 거물급 배우로 자리잡은 양조위가 어리버리한 신문사 기자역할로 등장하고 있지요.
하지만 더 인상적인건 스토리 라인에 주로 등장하는 위스키와 배추머리 콤비인데요, 여기서 위스키 역을 맡은 사람이 바로 서극 감독입니다. 여기서 그는 포복절도할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여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배추머리 역의 잠건훈은 [쾌찬차], [복성고조]등 주로 성룡영화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배우이지만 제작자로 활동하는 사람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서극과 함께 명콤비를 이루어 열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이 작품은 서극이 제작 총지휘를 맡아 작품 전반을 총괄했으며, 무술감독은 정소동이 맡아 특유의 현란한 와이어 액션을 선보입니다. 감독인 종지문은 촬영감독 출신이지만 연출력이 꽤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요, 차기작으로 선보인 임청하 주연의 [경천대모살]의 경우 홍콩영화로는 드물게 스릴러적 완성도를 갖춘 수작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후로는 계속 촬영감독으로 전념했더군요. (그 유명한 [황비홍]의 촬영도 이분 솜씨입니다) [철갑무적 마리아]의 특징 중 한가지는 바로 로봇을 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선동 1호'의 디자인은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데로 [기동전사 건담]의 '자쿠'와 아주 흡사한 외형을 갖추고 있지요. 하지만 [로보캅]에서 ED-209의 움직임에 스톱모션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선봉 1호'의 움직임을 거의 실사 그대로 표현하였는데요,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엉성하기 이를데 없고, 누가봐도 사람이 탈바가지 쓰고 들어가 움직이는게 표가 나지만 당시로서는 역동적인 모션 때문인지 꽤나 실감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하늘을 날으는 주인공인 '선봉 2호'의 경우, 훗날 [로보캅 3]에 가서야 '날아다니는 로보캅'이 등장했던걸 감안하면 상당히 시대를 앞서가는 센스를 발휘한 셈입니다.^^ 뭐 주먹도 발사되고 미사일도 날리는 건 좀 오버다 싶지만 말이지요 ^^
이 작품의 장르는 꽤나 복잡합니다. SF에 보스와 마리아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코미디에 액션까지 가미되어 풍부한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고 있지요. 물론 기본적으로 [철갑무적 마리아]는 코미디입니다. [로보캅]이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보여준 반면 [철갑무적 마리아]는 유쾌하고 긍정적이며 장난기가 가득한 영화로서 관객들을 웃음짓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어쨌거나 1988년이라는 시기에 일본의 [건헤드]와 더불어 또 한편의 실사 로봇물이 홍콩에서 나왔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비록 이 작품은 '어떻게 하면 로봇을 멋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할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을 웃길 수 있을까?"에 관심을 더 가진 듯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철갑무적 마리아]쪽이 더 기억에 남고 재밌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겠군요. ^^
P.S:
이 작품에서는 홍콩영화 특유의 퍼런 색조가 두드러집니다. 같은 푸른 화면이라도 마이클 만 감독의 그것에 비하면 왜이리 싼티나고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가 참 미스테리하지 않습니까?
* [철갑무적 마리아]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1988 Film Workshop Co. LTD.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메트로폴리스(ⓒ Universum Film (UFA).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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