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2
미국의 D.C.코믹스나 마블 코믹스의 풍부한 캐릭터들을 보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까지 널리 알려진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배트맨 같은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은 수십년간의 장기 연재는 물론이거니와 애니메이션, 극장용 실사영화를 비롯해 각종 프랜차이즈 산업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그에 비하면 한국에는 참 내놓을 만한 슈퍼 히어로 캐릭터가 없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홍길동이나 일지매 정도? 그나마 의적 설화에 바탕을 둔 이런 캐릭터들은 구체적으로 상품화 하기엔 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뭔가 좀 창조적이고 획기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슈퍼 히어로가 현실적으로 한국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슈퍼 히어로라는 컨셉 자체가 '애들이나 보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 기성세대들의 고리타분한 의식구조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어느날 저에게 한가지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과거 한국 만화중에도 '배트맨'에 버금가는 캐릭터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냐 싶었지만 심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일까... 한참을 조사해봐도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그 작품을 마침내 청계천의 한 비디오 가게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작품의 제목은 바로 [검은별과 황금박쥐]였습니다.
Batman™ by ⓒ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황금박쥐'라고? 어딘가 귀에 익지 않으십니까? 맞습니다. 1968년에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황금박쥐(Golden Bat)에서 그대로 가져온 이름입니다. 대머리 해골과 팬티만 입고 다니는 파격적인 코스튬으로 인기가 높았던 일본의 대표적인 슈퍼 히어로죠. 그런데 [검은별과 황금박쥐]의 비디오 표지는 사뭇 다릅니다. 아뿔싸! 이거야 옷만 노란색으로 바뀌었지 완전 배트맨과 동일한 캐릭터더군요.
ⓒ 대영동화/ Telecartoons Japan (TCJ). All Rights Reserved.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미국의 배트맨을 모델로 삼은 것 까진 좋습니다. 아니 그까짓 이름 짓는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일본 캐릭터의 이름까지 따와서 붙이는가 이말입니다. 차라리 배트맨을 직역해서 '박쥐인간'이라고 하던가... 모습은 배트맨이요, 이름은 황금박쥐인 이 울트라 퓨전 국적불명의 슈퍼 히어로는 유감스럽게도 한국말을 하며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엽기 캐릭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 삼영필름 All Rights Reserved.
사실, [검은별과 황금박쥐]에서 이야기 구조는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검은별 일당'과 '황금박쥐'의 대결구도. 그리고 '똘똘이'와 그의 친구 '덜덜이', 홍일점인 '영희' 그리고, 병상에 누워있는 황금박쥐의 왕팬인 '훈이'로 이루어진 어린이들의 모험담입니다. 이들 어린이들은 남다른 우정을 과시하며 똘똘 뭉쳐있는데, 어느날 산속에 귀신이 출물한다는 소문을 조사하기 위해 모험을 시작합니다. 알고보니 귀신의 정체는 자신들의 아지트를 은폐하기 위해 범죄조직 '검은별 일당'이 설치한 허접한 장치였습니다. 이것을 알아챈 어린이들은 악당에게 붙잡히게 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바로 '황금박쥐'입니다.
ⓒ 삼영필름 All Rights Reserved.
흥미로운 점은 작품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황금박쥐와 조직의 총수 검은별의 1:1 대결이 펼쳐지는데, 비록 검은별이 황금박쥐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기는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복수의 칼을 가는 악당의 건재함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속편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물론 속편은 없습니다 ㅡㅡ;;) 아무래도 어린이를 타겟으로 잡은 만화영화니 만큼 악당이라 할지라도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 당시의 정서상으로는 용납되지 않았나 봅니다.
ⓒ 삼영필름 All Rights Reserved.
ⓒ 삼영필름 All Rights Reserved. ⓒ 삼영필름 All Rights Reserved.
1979년, 필자가 태어난지 불과 몇 년 후라서 대사 하나하나가 지금의 관점에서는 폭소를 자아낼만큼 예술입니다. 예를들면, 검은별이라는 악당의 존재감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시퀀스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또한 황금박쥐의 첫 등장씬에서는 다음과 같이 배꼽을 잡게 만듭니다 ^^
노골적인 표절과 창의성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검은별과 황금박쥐]에는 70년대 당시의 순수했던 정서를 느낄수가 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힘겹게 신문배달을 하는 훈이를 돕는 아이들의 우정은 요즘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의 순박한 모습 그대로를 반영한 것이지요. 그나마 이런 정서를 이해해가며 추억에 잠기는 저역시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까요?
ⓒ 삼영필름 All Rights Reserved.
표절이라는 부끄러운 역사의 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어린날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당시의 애니메이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렵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불모지와 같은 분야를 개척해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가락질과 박봉, 잔업속에 시달리며 그들의 청춘을 보내야 했을지 이해가 갑니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우리들의 어린추억은 온통 마징가나 아톰밖엔 남아있지 않겠지요. (그래도 이 작품은 기억이 통 안난다는게 문제네요 ㅠㅠ)
물론 이러한 환경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채 하청시장에 흡수되어 버린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주소가 매우 유감이긴 합니다만 하다못해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처럼 촌스런 추억이라도 남겨주려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좋은 작품들을 의욕적으로 만들겠다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검은별과 황금박쥐]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삼영필름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배트맨 허쉬(ⓒ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배트맨 일러스트(ⓒ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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