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107
도무지 볼 영화가 없는 극장가 비수기가 돌아오면 늘 그렇듯 블록버스터도 아닌 것이 마치 몇억달러를 들인 대작인냥 관객들을 낚는 풍경이 벌어집니다. 뭐 꼭 블록버스터라고 해서 영화가 괜찮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제작비가 잔뜩 들어간 모양새를 기대했다가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올해는 [스카이 라인]이 그 역할을 대신할 것 같습니다. 사실 예고편만 보고나면 [스카이라인]은 무척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작품입니다. 대도시가 파괴되고 외계인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는 장면은 마치 [인디펜던스 데이]의 재림을 보는 듯 하거든요.
ⓒ Relativity Media/Hydraulx/Rat Entertainment. All Right Reserved.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어요. [스카이라인]의 감독이 누구냐면 콜린-그렉 스트라우스 형제입니다. 원래는 10대 시절부터 시각효과에 관심을 보여 [X-파일]의 시각효과 담당하면서 이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데 이후 [너티 프로페서]나 [볼케이노] 등 헐리우드 메이저급 영화의 특수효과를 연출하면서 이후에는 [타이타닉]의 빙하씬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잠시 MTV쪽으로 무대를 옮겨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U2 등의 뮤직비디오 속 특수효과를 경험하게 되지요. 나중에는 Hydraulx라는 특수효과 전문회사를 설립해 [투모로우]나 [터미네이터 3] 같은 블록버스터는 물론, [갓 오브 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의 게임에도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특수효과 전문가의 커리어를 쌓아 나갑니다.
ⓒ Relativity Media/Hydraulx/Rat Entertainment. All Right Reserved.
자, 특수효과쪽으로는 꽤나 잔뼈가 굵은 형제이긴 한데, 과연 연출쪽으로는 어떨까요? 이들이 감독으로 데뷔를 치룬 작품은 바로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 2: 레퀴엠]입니다. 사실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는 폴 W.S. 앤더슨 감독의 1편도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는데요, [AVP 2]는 그런 1편조차 걸작으로 보일만큼 평단과 관객들의 집중포화를 받은 실패작이 되고 맙니다. 폭스사의 유망 프랜차이즈를 시원하게 안드로메다로 보낸 이 형제에게 과연 누가 블록버스터 영화의 연출을 맡기고 싶어 했을까요?
ⓒ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All Right Reserved.
그럼 답은 뻔하죠. [스카이라인]은 그런 대자본이 투입된 메이저 영화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실제로 [스카이라인]은 어떠한 메이저 배급사의 지원없이 스트라우스 형제들의 사재를 탈탈 털어 완성한 저예산 영화입니다. 특수효과에 들어간 1000만 달러 외에 추가 제작비가 고작 50만 달러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니 대충 어떤 작품이라는 것인지는 감이 오게 되지요. 영화의 촬영은 그렉 스트라우스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한 아파트에서 주로 이루어졌는데요, 영화의 공간적 배경도 그 장소를 전혀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고편 만큼은 웬만한 블록버스터 저리가라 할 만큼의 비주얼을 보여주니, 특수효과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확실히 특수효과에 한해서는 스트라우스 형제의 솜씨를 인정할만 해요.
ⓒ Relativity Media/Hydraulx/Rat Entertainment. All Right Reserved.
이제 영화로 넘어갑시다. [스카이라인]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녘의 L.A를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몇 줄기의 밝은 빛이 내려오더니만 전 시내가 진동에 휩싸이게 되고, 곤히 잠들었던 한쌍의 남녀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런데 거실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옵니다. 남자는 재빨리 거실로 달려가 무슨일인지를 확인하던 중 창밖의 빛을 응시하다가 온몸에 핏발이 서면서 이상하게 변해갑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플래시백.
영화는 인트로 장면에서 몇시간 전의 상황을 비춥니다. 아까 보았던 그 남녀가 L.A로 오게된 이유와 친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장면들. 뭔가 중요한 계기나 단서라도 주어질 것처럼 과거로 시간을 돌려놓더니만 단순히 이놈들이 앞으로 자주 얼굴을 비출 주인공이라는 거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장면들로 초반 20여분을 날려먹습니다. ㅡㅡ;; 이제 다시 영화가 시작됐던 제 자리로 돌아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제부터 약 1시간 가량이 영화의 본론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스카이라인]은 딱 1시간짜리 영화라고 보면 됩니다.
ⓒ Relativity Media/Hydraulx/Rat Entertainment. All Right Reserved.
[스카이라인]의 내용은 단순해요. 외계인들이 L.A를 침공하는데 주인공들은 아파트를 빠져나갈 것이냐 아님 이대로 구조대를 기다릴 것이냐를 놓고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어차피 죽을놈은 다 자빠지고, 살놈도 뭐 어영부영 그렇게 되는 그런 삐리리한 영화입니다. 각본이 단순한건 꼭 나쁘지만은 않아요. 어찌보면 [스카이라인]은 [인디펜던스 데이]의 스케일에 [클로버 필드]식 단촐함을 결합시킨 좋은 응용 사례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스카이라인]은 하필 가장 안좋은 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인디펜던스 데이]가 외계인 컴퓨터와 지구 컴퓨터의 OS가 서로 호환된다는 개 풀뜯어 먹는 각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화면빨로다가 관객들을 셧업시켜버린 거라든지, 혹은 [클로버 필드]가 논리, 개연성 이런건 다 무시하고 오로지 현장감과 스릴만을 추구해 성공을 거둔걸 보면 영화가 뭔가 확실한 거 지향점은 가지고 있어야 먹힌다는 걸 알게 됩니다. [스카이라인]은 그게 없어요. 1천만달러 짜리 영화치곤 특수효과가 제법 쓸 만하다는거? 이거 왜이래요. 우리나라도 [디 워] 정도는 만들 줄 안다구요. 잘나가다가 갑자기 CG에서 고무인형으로 둔갑한 외계인을 주인공이 맨주먹으로 패는 장면에선 그야말로 폭소가 터져나오더군요. 이거 어사일럼식 연출방법 맞죠?
그렇다고 아파트 건물이라는 좁은 공간을 훌륭히 활용해 서스펜스를 살렸느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다양한 캐릭터에 개성을 불어넣어 군상극의 묘미를 추구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고, 뭐냐 말하려는게. 그냥 외계인이 침공했는데, 임신한 내 여친만큼은 지켜야 남자소리듣지 뭐 이런거? 그래서 엔딩을 고 따위로 처리한 걸까요? (보면 압니다. 속편까지 암시하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엔딩을)
감독이 촉수물을 너무 많이 봤나, 외계인들의 디자인도 그냥 혐오스러울 뿐 뭔가 독창적인 맛이 없습니다. 자고로 거대 크리쳐의 묘미란 스크린상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스케일이 느껴지질 않아요. 그저 감독의 주특기인 시각효과로 최소한의 비용문제를 최대한의 포장으로 커버하려 했을 뿐이죠. 지구방위대와 외계인들의 공중전도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꽤나 흥미진진한 액션씬이 나왔을 것도 같은데, 뭡니까. 스텔스기가 발사한 미사일 한방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모선이 추락하는 싱거움은.
ⓒ Cine 21. All Right Reserved.
게다가 대사들은 또 얼마나 쿨하던지요.
여: 나 임신했어.
남: Sh*t !
이렇듯 [스카이라인]은 저예산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확실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영화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문을 나설때 참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는데요, 관객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웃음이 서려 있었다는 것이죠. 뭐 영화가 만족스러워서는 절대 아닐거고, 그만큼 [스카이라인]은 의도와는 다른 웃음을 관객에게 선사한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긴 이 영화를 보면서 저도 엄청나게 웃었네요.
흥미롭게도 [스카이라인]은 벌써부터 쏟아져 나오는 지독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개봉 첫주만에 제작비 전액을 가볍게 회수하는 쾌거를 거둡니다. 네... 이만하면 [스카이라인]의 전략은 분명해졌네요. 최대한 비수기에 맞춰서 현란한 예고편으로 관객을 낚는 작전. 아... 이 영화의 속편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상상만해도 즐거워 집니다. (엔딩을 보면 기대가 아니될 수 없다니까요) 오늘의 교훈. 예고편에 속지 말자.
짤방 출처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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