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괴작열전(怪作列傳) : 무림 걸식도사 - 국적불명의 권격영화 시대를 추억하다

페니웨이™ 2009. 10. 2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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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작열전(怪作列傳) No.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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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그러니까 2008년 초에 네이버 지식인에서 한 영화와 관련된 질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이버 지식in에서 발췌

옛날 홍콩 액션 영화 인데요. 마지막 부분만 어렴풋이 생각 납니다.

' 상대편 적의 대장이 의자에 앉아, 손잡이에 있는 검은색 단추와 하얀색 단추를 누르는데 그때마다 주인공 에게 어떠한 공격이 가해 졌던것이 기억 납니다. 발 아래에서 뾰족한 침이 올라와 발등을 찌르는 등등 말이죠..'

 마지막 앤딩은 주인공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절뚝 거리며 걸어가는 장면 이구요(붉은 노을에 비춰진 모습 이었음.) 그때 흘러나왔던 BGM 이 인상이 깊게 기억 납니다. 제목은 기억나질 않지만, 꼭 다시한번 보고싶은 영화 입니다.

혹 아시는 분 계시다면 제목 좀 가르쳐 주세요....





네, 딱 보아하니 저와 비슷한 연배의 남성들은 대부분 기억하실 만한 영화더군요. 근데 처음 올라온 답변이 참 걸작입니다.

 

네이버 지식in에서 발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이래서 네이버 지식인은 kin하셈~ 이러는 겁니다. 모르면 아예 답을 말던가... 왠 [배틀로얄]? [배틀로얄]에 그 비슷한 장면이라도 나오면 말을 안합니다. 이건 뭐 초딩의 답변인가 싶기도 하지만 [배틀로얄]은 애들이 보는 영화가 아닌데....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정확한 답변을 올려놓은 분이 있더군요.

네이버 지식in에서 발췌


네, 아마도 바닥에 숨겨진 칼날이 주인공의 발을 뚫고 나오는 후반부의 그 장면만큼은 [무림 걸식도사]를 각인시키는 대단히 인상적인 시퀀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무림 걸식도사]는 1980년대 초반 무수히 쏟아졌던 권격영화 중에서도 가장 뇌리에 깊히 박혀있는 작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 국제영화흥업㈜. All rights reserved.

아마 [무림 걸식도사]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위의 두 장면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악당이 설치한 칼날이 걸식도사의 발등을 꿰뚫는 잔혹한 장면은 이 영화를 두고두고 잊지못할 작품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중반 전설같은 생을 마감한 이소룡의 사후 홍콩 영화계는 성룡이라는 배우의 등장으로 코믹 쿵푸영화의 전성시대를 열게 됩니다. 특히 성룡을 스타덤에 올렸던 [사형도수]와 [취권]은 국내에서도 크게 성공하며 한국 영화계의 흐름을 많이 바꾸어 놓았지요.

당시 한국 권격영화는 이같은 홍콩 쿵푸영화와 한국식 무술영화의 경계에 위치한 무국적 스타일의 괴작들을 수없이 양산해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김정용 감독의 [소림사 주방장] 시리즈인데요,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사형도수]와 [취권]에 등장하는 원소전[각주:1]의 거렁뱅이 스승 이미지를 차용해 이른바 '걸식도사'라는 캐릭터를 재창조하기에 이릅니다.

ⓒ ㈜우성사. All rights reserved.

김정용 감독의 [소림사 주방장]. [사형도수], [취권]의 인기에 편승해 국적을 모호하게 만든 짝퉁 저예산 무비이지만 10만 관객동원의 흥행성공을 거두어 한국산 유사 권격영화의 흐름을 주도했던 대표작으로 기억된다.


사실 조악한 세트와 저예산으로 점철된 B급 쌈마이 작품이기는 했지만 홍콩영화처럼 포장된 국적불명의 영화들은 의외로 2류 영화관에서 꽤 짭잘한 흥행을 기록하며 한국영화사의 한켠을 장식하는 장르물로 자리잡게 됩니다. 특히 김정용 감독의 페르소나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함께한 정진화는 한국 유사 권격물의 마지막 세대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던 배우였습니다.

이렇게 김정용-정진화 콤비가 유명세를 타게 되자 이들은 아예 '걸식도사'를 타이틀로 내세운 작품을 내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982년작 [무림 걸식도사]입니다. 이 [무림 걸식도사]는 여러모로 [소림사 주방장]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으로서 감독, 각본 및 주연도 전작들과 거의 동일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내에서 걸식도사라는 인물이 '내가 한때 소림사 주방장으로 일했어~'라며 전작에 대한 오마주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죠.[각주:2]

출처: 네이버 디지털 아카이브 (동아일보 1982.11.4)


그럼 일단 영화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저도 본지 꽤 오래되어서 다시보니까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줄거리가 생소하더군요.

영화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청나라 시대 중국의 화남성입니다. 청으로 건너간 조선인 상인들은 청나라 사람들과 상권을 놓고 갈등을 겪습니다. 물론 조선인은 사회적 약자로서 보부대상인 진무웅의 보호아래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청국상인의 보스 장태사는 눈엣가시인 진무웅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묘책을 강구합니다.

한편 어디선가 자신을 '걸식도사'라고 소개하는 거렁뱅이 조선인 한사람이 나타나 가엾은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고 청나라 건달들을 혼내주면서 조선인들은 한층 더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장태사는 100명을 해치웠다고 알려진(실은 99명을 죽였고, 1명은 그 모습을 보고 심장마비로 사망. 헐~) 킬러 천상두를 고용해 조선인을 탄압하는 한편 진무웅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 국제영화흥업㈜. All rights reserved.


분노한 걸식도사는 천상두의 패거리와 맞서려 하지만 이를 가로막는 괴인이 등장하는데 등뒤엔 '귀(鬼)'라고 쓰여진 옷을 입은 이 사나이는 자칭 '인간 밀렵꾼' 귀타귀. 이 인간은 죽은자(좀비 혹은 강시)를 움직인다는 장본인으로 아무리 맞아도 끄덕하지 않는 괴물같은 방어력을 자랑하는데, 걸식도사의 화려한 무술솜씨를 눈여겨 본 뒤 그의 몸을 갖고자 장태사의 하수인으로 고용계약을 맺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놓은 걸식도사는 벼락칠때 허점이 드러나는 귀타귀의 약점을 이용해 가까스로 이를 물리치지만, 막강한 적수인 천상두가 걸식도사의 중국인 여친을 납치하는 바람에 그를 쫓아가 혈투 끝에 승리를 거둡니다. 이제 남은 건 최종 보스인 장태사. 항상 절름발이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다니던 장태사는 눈앞에 나타난 걸식도사를 보며 자신은 장애인이라며 발밑의 버튼을 누르는데, 이때 바닥에서 튀어나온 칼날에 당한 걸식도사는 그만 왼발의 전투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하지만 정작 장애인인 척 했던 장태사는 실은 멀쩡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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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서 과연 걸식도사는 애인도 지키면서 악의 화신인 장태사를 이길 수 있을까요? 뭐 답은 이미 나와있습니다만.

[무림 걸식도사]는 이렇게 청나라에서 탄압받는 조선인을 구하는 일종의 '슈퍼히어로 무비'로서 전라도 전주 사나이 걸식도사의 구수한 사투리가 인상적인, 토속적이면서도 친서민적인 영웅상을 구축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싸우는 장면이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액션씬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전체 영화의 90%에 달하는데요, 그만큼 스토리와 캐릭터의 구축은 상대적으로 허술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악역인 청나라 불한당들은 전형적이다 못해 진부하기까지한 악당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에 맞서는 크라임 파이터, 걸식도사 역시 기존 영화들의 관습적 영웅주의를 그대로 반영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오히려 민족주의적인 개념을 제거해놓고 보면 [황야의 무법자]나 [라스트맨 스탠딩] 같은 헐리우드 영화들, 그리고 이 작품들의 원작이었던 구로자와 아키라의 [요짐보]처럼 무명의 떠돌이가 한 마을에 당도해 그곳에서의 우환을 해결하고 홀연히 떠나는 내러티브와도 쏙 닮아있습니다.

ⓒ 국제영화흥업㈜. All rights reserved.


문제는 이러한 내러티브의 연계도 굉장히 느슨하다는 겁니다. 저는 생략의 미학을 꽤나 존중하는 편입니다만 [무림 걸식도사]는 굉장히 터프한(?) 편집기술을 보여줍니다.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 자체가 필름 유실등의 문제로 불완전한 버전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내용 전개에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뭔가 일을 벌려놓고서는 수습이 안되자 '에라 모르겠다'하고 먹튀하는 기분이랄까요.

또한 억지스럽거나 유치한 부면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귀타귀의 존재인데, 좀비와 연계되어 오컬트적인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주는 이 캐릭터는 영화의 전개상 아무 짝에도 필요없는 역할이 되어 버렸고, 또한 걸식도사와 므흣한 감정을 주고받는 짱깨집 딸내미는 그저 남정내들이 들끓는 마초영화속에 얼굴마담으로 잠시 등장한 것 외에는 오히려 영화의 몰입을 방해할 따름입니다. 아, 물론 이 여인이 막판에 장태사와의 대결에서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긴 하는군요.

성룡식 코믹쿵푸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억지스런 웃음을 유발하는 연출도 조금은 불만입니다. 원래 이 계열의 영화가 대부분 비슷한 컨셉으로 나가긴 합니다만 사람이 피를 토하며 죽어나가거나 암기가 발등을 뚫고 나오는 잔혹함과 맞물려 기묘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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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림 걸식도사]는 당시의 관점에서 보노라면 무척 재밌었던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영화의 90%를 차지하는 액션은 잘짜여진 콘티에 맞게 스피디하면서 박력이 느껴진다는 겁니다. 짝퉁이긴해도 액션만큼은 원조 홍콩영화와 비교해 전혀 꿀리지 않는다 이 말씀이죠.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장태사와 걸식도사의 대결은 무려 20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액션의 중심에는 주인공 걸식도사 역의 장진화와 악당 장태사 역의 왕룡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진화는 이 작품 이후에도 계속 [소화성 장의사]나 [아라한][각주:3] 같은 작품들에서 꾸준한 활동을 보이다가 권격영화의 쇠퇴와 함께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반면 김정용 감독의 전작 [소림자 주방장] 시리즈에서 원조 걸식도사를 연기했던 왕룡은 이번엔 악역으로 등장합니다만 훗날에도 한국 무술영화계뿐만 아니라 아동용 영화의 품종을 왕성히 계량한 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네, 바로 전설의 괴작 [북두의 권]과 [드래곤볼]을 감독한 바로 그 왕룡 감독님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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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권격영화계의 풍운아 왕룡. 선굵은 마스크와 뛰어난 무술솜씨로 1980년대 무술영화계를 주름잡았던 그는 훗날 감독으로 데뷔, [북두의 권], [드래곤볼]과 같은 세기말적인 괴작을 내놓으며 매니아들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한편 김정용 감독은 홍콩과 한국을 넘나들며 메이저급 감독으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정창화 감독과는 달리 [산동 물장수] 시리즈의 김선경 감독과 함께 B급 권격물의 계보를 지켜온 인물로서 나름 영화사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만 [비천괴수] 같은 삑사리를 내셨다가 급기야는 19세 이상 어른들만 볼 수 있는 영화로 전향하면서 결국 한국의 장철 감독으로 남을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싸구려 느낌을 풀풀 풍기는 짝퉁 권격영화 [무림 걸식도사]는 나름 의미있는 괴작으로서 아직까지도 많은 3040세대의 기억속에 남아 있지만 한국의 필름 관리의 현주소가 언제나 그렇듯, 지금 국내에서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DVD발매는 커녕 영상자료원에서도 마스터 필름은 유실된 채 듀프 네거티브 필름 한벌만이 보관되어 있을 뿐입니다. VHS로 출시가 되긴 했습니다만 역시나 퇴출된지 오래된 작품인지라 남아있는게 거의 없는 형편이지요.[각주:4]


오히려 이 작품의 보관상태는 외국이 더 좋습니다. 이미 외국에서는 'Invincible Obsessed Fighter'란 제목으로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유럽 등지에 DVD로 출시되어 있습니다만 중국어 아니면 영어로 더빙한 판본인데다 주연배우들 및 스탭의 이름도 영어식으로 개명했고, 심지어 '홍콩 커넥션'이라는 타이틀로 국적까지 바뀌어 출시되어 있습니다.[각주:5] 우리 영화를 우리 것이라고 하지 못하는 이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정녕 김정용 DVD 컬렉션이나 정진화 박스셋 같은걸 기대하는건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P.S:

1.일부 시놉시스에는 걸식도사의 극 중 이름이 강유림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적어도 제가 소장한 비디오 판본에서는 걸식도사의 실명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걸식도사일뿐.

2.[소림사 주방장] 시리즈와 그 밖의 80년대 초반 유사 권격영화들의 소스가 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인 [무림 걸식도사]를 선정하였으니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이 많은 작품들을 다 소개하다간 끝이 없습니다.

3.[무림 걸식도사]는 1982년 11월 5일 종로3가에 위치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해 32389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나쁜 성적이 아니었군요.

4.무려 3년간 수소문해 겨우 우리말 더빙판본을 입수했네요. 한국영화 구하는 일이 해외영화보다 몇배는 더 힘들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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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2009.11.2. 야후의 메인페이지, 말 많은 이슈란에 소개되었습니다.



 * [무림 걸식도사]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국제영화흥업㈜. All rights reserved.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1. 최근 헐리우드에서 무술감독으로 맹활약중인 원화평 감독의 아버지로서 젊었을때 보다는 나이가 든 후에 [취권] 등에서의 주정뱅이 사부 이미지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본문으로]
  2. 소림사 주방장의 정식 속편인 [돌아온 주방장]의 개봉일은 1983년 3월로 [무림 걸식도사]보다 5개월 뒤다. [본문으로]
  3. 영화키드 류승완 감독은 [아라한]이야말로 1980년대 한국 무술영화의 결정체라고 극찬한바 있다. 그는 이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서 2004년 자신의 작품에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본문으로]
  4. 필자가 소장중인건 VHS를 디지털 트랜스퍼한 판본으로 화질도 좋지 않을뿐더러 중간중간 삭제된 장면이 있다. 다행이 한국어 더빙이라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오리지널 그대로 대사를 듣는 맛이 있고, 더군다나 왕룡의 성우는 바로 유강진이다! [본문으로]
  5. [무림 걸식도사]의 해외판본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북미판인 Xenon Pictures에서 출시한 버전 외에도 Ground-Zero Entertainment 판본과 영국에서 출시된 판본도 서로 다른 소스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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