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괴작열전(怪作列傳) : 로보트왕 썬샤크 - 반공 애니메이션 시대의 종식을 고하다

페니웨이™ 2009. 8. 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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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작열전(怪作列傳) No.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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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몇편의 국산 애니메이션이 괴작열전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만 사실 이런 국산 애니의 테마는 '표절'이란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결국 '창작'이라는 과정이 제거된채 반복되는 표절의 역사속에 국산 애니메이션은 서서히 자멸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지요.

 

모름지기 창작이라 함은 그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이념이나 사상을 강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자의 자발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할 때 빛이 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철저한 암흑으로 빨려들어가는 흑역사의 퍼레이드라 말할 수 있습니다.

19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우리 세대의 아이들은 유독 '반공'이라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습니다. 반공 포스터 그리기라든지 반공 독후감이라든지, 한창 토론과 자기 의견을 발표하며 창의력을 개발해야 할 나이에 '무찌르자 공산당' 과 같은 구호를 강제적으로 주입받으며 성장했으니까요. 그러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보다 어린아이들에게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건 바로 문화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속된말로 교과서 한번 안들여다보는 녀석들도 만화영화라면 사족을 못쓰고 달려드는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출처미상 (저작권자 소실)

1980년대를 주름잡던 클로버 문고 시리즈 중 [백자바위 마인]. 아예 '반공만화'라고 써있는 것처럼 반공의식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이 당시에는 꽤 많았다.


1970년대 후반 유신헌법이 통과된 이후 제정된 영화법 개정안을 보면, 영화의 제작은 당국의 허가를 받은 업자만이 가능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충무로에서 잔뼈 굵은 감독들도 이 당시에는 뜬금없는 전쟁영화를 내놓거나 정책홍보용 작품을 만드는 촌극이 벌어지게 되지요. 이는 비단 국내뿐만이 아니라 냉전이 국제적 기류를 형성했던 당시 세계정세의 흐름상 한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서방측의 영화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KGB나 소련군이 악의 화신으로 묘사된 영화들이 쏟아졌던 시기이기도 했거든요.

 

영화계의 판도가 이러할진데, 하물며 고상한 어르신들께 불량식품 취급을 받았던 만화영화야 오죽했겠습니까? [로보트 태권브이]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를 배제했던 김청기 감독조차 자신의 페르소나인 똘이를 반공투사로 변신시켜 1978년 [똘이장군 제3 땅굴편]을 개봉해 본격적인 반공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아광고/서울동화. DVD 판권- 네오센스. All rights reserved.



뒤이어 [간첩잡는 똘이장군]이나 [해돌이의 대모험], [해저탐험대 마린X] 등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어린이용' 반공 애니메이션들이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나 [해돌이의 대모험]의 경우 이례적으로 후지 타케시(藤井丈司)라는 일본 스탭이 참여해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고, 작화의 퀄리티도 우수한 작품으로 남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반공 애니메이션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렇듯 한국 애니메이션은 순수 창작물에서 멀어져 점차 방향성을 잃어가게 되는데요,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작품은 침몰해가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일종의 바로미터 역할을 합니다.

[77단의 비밀], [도깨비 감투] 등을 내놓으며 한때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유망주로 떠오른 박승철 감독의  [로보트왕 썬샤크]는 반공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특혜를 누렸던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작품입니다. 초장부터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반공영화"라고 떳떳하게 정체를 밝히는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주제에 놀랍게도 실사화면으로 시작하는 의외성을 보여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3광고. All rights reserved.


한 시골마을에 무장공비가 침투해 민가에 정찰을 나갔다가 집지키던 인복이 남매와 대면하게 됩니다. 시작부터 아스트랄한 반공교육의 향연이 시작되는데요, 강도냐고 묻는 인복이의 질문에 간첩들은 우리 미국서 온 아저씨들이니 나쁜 사람 아니라면서 아이들을 안심시키지만 정의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복이 왈, 딱보니 무장공비인데 초딩이라고 무시하나효? 하면서 아저씨들의 성질을 돋우다가 여동생과 함께 싸닥션을 맞고 쓰러집니다. 그리고는 셰익스피어도 울고 갈 명대사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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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비가 떠난 후 인복이는 철저한 신고정신을 발휘해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이웃 아저씨에게 간첩의 소행임을 알리자, 마을 청년들은 즉각 무적의 예비군[각주:1]으로 변신해 투지를 불태웁니다. 장면이 바뀌어 선생님과 함께 낚시터에 소풍을 나온 한 무리의 초딩학생들이 근처에 간첩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고 무서움에 떨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맙니다.

 

그리고는 이제 본격적인 애니메이션이 시작되는데요, 아이들이 잠든 호숫가에 어디선가 날아온 헬기가 불시착합니다. 이 헬기는 썬샤크 로봇으로 변신해 아이들을 위협하는 무장공비를 물리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로봇에 타고 있던 아그네스, 아리아와 친해집니다. 이 두 사람은 오로라 별에서 온 외계인인데, 악당 스펙터가 핵전쟁을 일으켜 이를 정화할 수 있는 산소 유전자를 구하러 지구에 온 것이었습니다. (산소 유전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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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그렇다면 스펙터도 지구에 왔겠군요. 맞습니다. 스펙터는 지구 정복의 야심을 품고 무려 혹부리 수령(주의: 절대 김일성이 아닙니다!)과 동맹을 맺고 남한으로 진격해 들어오려 합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초글링들과 썬샤크는 스펙터와 혹부리 수령이 이끄는 특수8군단에 맞서 한반도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내 생전 엉터리 영화들을 수 없이 많이 봐 왔지만 [로보트왕 썬샤크는] 정말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국산 애니메이션의 암적인 요소들은 이 하나의 작품에 모조리 담겨져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한가지씩 살펴보죠.



    1.표절문제  


네네, 그놈의 지긋지긋한 표절은 여기에서도 계속됩니다. 사실 작품속에서 보여지는 로보트 썬샤크의 오리지널 디자인은 약간 다릅니다만 스폰서인 진양과학에서 프라모델로 출시된 썬샤크[각주:2]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장기병 돌바크]에 등장하는 루이 오베론의 탑승기 가제트를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 [각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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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Fuji TV/Production Reed. All rights reserved.

[로보트왕 썬샤크]에 등장하는 썬샤크(위)와 [특장기병 돌바크] 중에서 오베론 가제트의 모습(아래 사진 중 붉은색 박스 안). 애니메이션 상으로는 오리지널 디자인에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헬기로 변신하는 설정은 동일하며, 무엇보다 출시된 프라모델은 오베론 가제트의 카피판이었다.


뭐 베낀게 이거 하나면 애교로 봐줄텐데, 나중에는 로봇 3대가 합체해서 카메라로 트랜스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네, 바로 이녀석은 타카라 사의 '신 미크로맨' 출신으로 나중에 '트랜스포머' 에서 디셉티콘에 가세해 활약하는 리플렉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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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Hasbro. All rights reserved.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작품에서는 심지어 지난번에 소개한 [불사조 로보트 피닉스킹]의 주제가가 BGM으로 쓰입니다. ㅡㅡ;;

 



    2.최악의 퀄리티  


그간 반공 애니메이션이 많이 나온건 사실이지만 이전의 작품들은 대부분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재향군인회'니 '대한반공청년회'니 하는 막강한(?) 스폰서가 달라붙어서인지 퀄리티만큼은 꽤나 괜찮았던 작품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로보트왕 썬샤크]는 실사를 도입한 것 자체가 그 의도를 의심스럽게 할만큼 저예산의 냄새가 팍팍 풍깁니다. 이를테면, 원래 붉은색이었던 로봇이 다음 장면에서는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다던지 하는 작화의 무성의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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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3광고. All rights reserved.


또한 지구로 온 상황을 설명하던 주인공의 얼굴이 갑자기 혹부리 수령의 얼굴로 바뀌는데, 이렇게 수령의 얼굴로 바뀐 장면에서도 주인공의 대사가 줄줄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지독한 편집상의 오류죠.

 



    3.짜증스런 각본  


반공도 좋지만요,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우선 이 작품의 메인 악당은 지구를 침략한 스펙터 일당인데, 실상 영화를 다 보고나면 진정한 악당은 혹부리 수령이라는 결론으로 바뀝니다. 단물만 빨아먹다 필요없을 때 등돌리는 수령의 모습은 정말 냉혹함 그 자체이지요. (사실 아동 애니메이션에 이 정도로 캐릭터를 냉혹하게 표현한다는 건 당시 기준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데, 이것이 용납될 수 있었던 것도 다 '반공물'이라는 일종의 면죄부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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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특수8군단에 맞설 사람이 없어 초딩들을 단체로 정신감응시켜서 군바리화 시키는 건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가요. 이건 뭐 각본이라고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설득력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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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애니메이션, 아니 하나의 작품으로서 최소한의 모양새도 갖추지 못한 [로보트왕 썬샤크]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성장동력을 갉아먹던 모든 악재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으로서 이듬해 개봉된 [각시탈]과 더불어 반공 애니메이션 계보의 마지막 작품이 됩니다. 신군부의 집권이 끝물에 이른 1987년 이후로 대종상 영화제의 반공영화부문도 폐지되고, 이후 반공을 소재로 한 영화와 애니메이션들은 거짓말처럼 극장가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지요.

한편으로는 그 의도야 어떻든간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접목시킨 최초의 국산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작품이 지닌 원죄적 단점들을 덮기에 역부족입니다. 저질문화니 어쩌니 하면서 만화영화를 마치 어린아이들의 정서를 좀먹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것도 모자라 얼마 되지도 않는 아이들의 문화 컨텐츠마저 이념의 도구로서 이용하려 들었던 어른들의 욕심이 얼마나 민망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본 리뷰는 2009.10.21. Yahoo의 메인 페이지 '말많은 이슈' 코너에 소개되었습니다.



* [로보트왕 썬샤크]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제3광고 혹은 이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백자바위 마인 3권 표지(출처미상. 저작권자 불명), 똘이장군(ⓒ 동아광고/서울동화. DVD 판권- 네오센스. All rights reserved.), 특장기병 돌바크(ⓒ Fuji TV/Production Reed. All rights reserved.), 트랜스포머 리플렉터(ⓒ Hasbro. All rights reserved.)





  1.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용인군 외사면대 예비군들이 찬조출연하고 있다. [본문으로]
  2. 진양에서 출시된 프라모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로보트왕 썬샤크]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오베론 가제트의 카피였으며 더 황당한 것은 [출동! 에어울프]로 출시된 오베론 가제트의 카피였다. [본문으로]
  3. [특장기병 돌바크]의 로봇중 무겐 칼리버는 훗날 김청기 감독의 [우뢰매 2]에서 메카닉 얼굴이 표절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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