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22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역작 [기동전사 건담]을 모르시는 분은 아마 안계실 겁니다. 국내에서는 단 한번도 정식 방영을 한 적이 없음에도, 7,80년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건담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참 특이한 현상이지요. 요즘 사람들이야 [건담 씨드]니 [건담 더블오]니 하는 최신 건담시리즈를 인터넷이나 케이블, DVD 등을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방영도 안된 애니메이션이 그렇게 인기를 끈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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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요? 어떻게든 건담을 보고 싶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한 애니메이션 제작자는 다음가 같은 선언을 하게 됩니다.
(해석: 나라의 애니메이션이 일본과 달라 정서가 서로 같지 아니하다.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즐기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이가 많으니라. 내 이를 안타까이 여겨 새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노니, 그 이름을 [우주 흑기사]로 할 따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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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이름도 유명한 [우주 흑기사]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 이건 뭐 너무나도 유명해진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라 굳이 괴작열전에 포함시키기도 민망할 지경입니다만, 그래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할 작품이기에 어쩔 수 없이 소개하게 되는군요. 네, [우주 흑기사]와 [기동전사 건담]의 연계성은 강조하지 않아도 웬만한 분들은 다 알고 계실겁니다.
가면을 쓰면 샤아 아즈너블, 벗으면 아므로 레이가 되는 엽기찬란한 설정을 포함해, 세일러 마즈도 가면을 쓰면 키시리아가 되어 버리는 참으로 슬픈 작품이지요. 게다가 도즐 중장은 약을 잘못 먹었는지 얼굴색이 녹색이라 누가보면 '슈렉'내지는 '헐크'로 착각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야 [우주 흑기사]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품의 원작에 허영만 화백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이거 정말 [타짜], [식객]의 허영만이 맞는 겁니까? 라고 물으셔도 저로선 정확한 대답을 드릴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허나, 관련 정보를 좀 조사해보니 실제로 빙그레 문고 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된 현대 코믹스판 [우주 흑기사]에도 허영만 화백의 이름이 쓰여있더군요. 물론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작자 본인은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허화백의 작품이라 해도 이제와서 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없겠지만요, 그 시절 배고프지 않은 만화가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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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흑기사에 맞서는 악당의 성우는 한때 성우협회 협회장을 역임하신 (주로 '숀 코네리', '말론 브란도' 전담인) 유강진씨가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코믹하고 과장된 연기가 압권이더군요. 개인적인 바램 같아서는 허영만 화백이나 유강진씨 같이 이 작품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을 모아, [우주 흑기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인터뷰하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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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우주 흑기사]는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기동전사 건담]을 이용한 최초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기네스북 감이라능~) [기동전사 건담]의 정식 극장판이 선보인 것이 1981년이니까 무려 2년이나 앞서 있다는 얘기지요. 1979년은 [기동전사 건담]이 TV방영을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즉, 일본에서 건담이 공중파를 타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이미 극장에서 샤아와 아므로의 짬뽕 캐릭터를 감상하고 있었다는 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을까요? 다음은 당시 [우주 흑기사]의 콘티를 맡았었다는 B 감독의 말입니다.
"그 때 건담을 하청 받아서 그려주고 있었거든. 그래서 그 캐릭터 갖다가 썼지 뭐! 옛날에는 다 그렇게 했지..." - 1999.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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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한국 표절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하청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청기 감독이 줄기차게 창작 애니메이션의 필요성을 역설한것도 (기실 그분 역시도 이같은 표절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지언정) 창의성이 부족한 애니메이션으론 결국 하청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국내 애니메이션계의 체질적인 취약점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안타깝기가 서울역에 그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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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특이하게도 [우주 흑기사]에는 로봇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을 베이스로 만들었고, 게다가 당시에 극장 애니메이션의 추세가 대부분 남자아이들을 겨냥한 로봇물이 대세였다는 걸 감안하면, 흑기사로 돌변한 샤아-아므로의 1인 액션활극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 꽤 독특하다고 생각되는군요. 비록 캐릭터는 빌려썼다해도 스토리만큼은 창작극으로 가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드러낸 것일까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우주 흑기사]의 비디오 판본에 보면 표지에 '해외수출 걸작만화'라고 당당히 쓰여져 있다는 겁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완전 국제적인 망신아닙니까? 그래서 얼른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았더니 유튜브에 [우주 흑기사]의 동영상 클립이 몇 개 올라와 있는데, 한국어가 아닌 '태국어(로 추측)' 더빙본이더군요. 이로서 해외에 수출된건 확실한듯.. ㅠㅠ
이 작품은 후에 재편집되어 [블랙 트리오]라는 제목으로 재개봉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후자의 제목으로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테지요. 어쨌거나 [우주 흑기사]는 [기동전사 건담]의 유명세 덕분에 개봉한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좋은쪽으로가 아니라 나쁜쪽으로 말이지요. 하긴, 토미노 옹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뒷골을 부여잡을 일 아니었겠습니까?
* [우주 흑기사]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1979 제3광고. (혹은 이 제작사에서 판권을 위임받은 회사)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기동전사 건담(ⓒ 創通/ サンライズ All Rights Reserved.), 우주 흑기사 코믹스판(ⓒ 현대코믹스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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