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작 팀 버튼의 [혹성탈출] 리메이크를 포함해 지금까지 나온 [혹성탈출] 시리즈는 총 6편, 여기에 애니메이션판과 TV드라마를 합치면 정말 많이 우려먹은 프랜차이즈입니다. 사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올 여름 블록버스터 가운데서도 가장 기대치가 떨어지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비호감에 가까운 영화였죠. [혹성탈출]이 딱히 [스타워즈]급의 어마어마한 팬덤을 형성한 작품도 아니거니와, 팀 버튼의 [혹성탈출]이 받은 수모를 생각하면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기획물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작품에 대해 언론과 홍보사 측은 [혹성탈출]의 프리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걸 망각하고 있더군요. 어떤 작품의 프리퀄이냐가 빠진것이죠. 팀 버튼의 [혹성탈출]이 리메이크라고 불리긴 합니다만 엄밀히 말해 1968년 작 [혹성탈출]과 팀 버튼의 작품은 완전히 다른 영화입니다. 설정과 주인공, 내러티브도 전혀 다르죠. 그런데 이 서로 다른 두 작품 중 어떤 영화의 전편에 해당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어디에 기준점을 두고 영화를 봐야할 것인지 난감할 수 밖에 없잖습니까.
우선 이 작품은 68년작의 프리퀄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68년작 [혹성탈출]은 왜 인간들이 쇠락하고, 유인원들이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드러냅니다. 여기서 사용된 설정은 '핵'이었고, 당시 미소양국의 핵개발 경쟁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시대적 자화상으로 풀어내려 했었죠. (이번 작품에서 인류가 멸망하게 된 원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더구나 최초의 '지능 유인원' 시저의 출생비밀은 시리즈 3편인 [혹성탈출 3]를 통해 명백하게 설명됩니다. 이 때 탄생한 시저는 계속되는 시리즈 4,5편을 이끄는 중심 캐릭터로 성장하게 되죠. 따라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나온 시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설정을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 20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
[혹성탈출 4: 노예들의 반란]에 등장하는 시저. 오리지널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다룬 설정과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상이한 차이점을 보인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의 프리퀄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깁니다. 일단 팀 버튼의 리메이크는 68년작의 설정을 너무 벗어나 있어요. [혹성탈출 (2001)]에서 언급된 유인원들의 시조는 '시저'가 아니라 '시모스'입니다. 따라서 시저의 탄생과 [혹성탈출 (2001)]과의 연계성을 애써 찾는건 무의미해 보입니다. 영화 중간에 유인 화성 탐사선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뉴스가 아주 잠깐 언급되는데, 이것이 [혹성탈출 (2001)]과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 것인지는 아직까지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답은 나온거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프리퀄이 아닙니다. 우린 이런 류의 영화를 '리부트'라고 부르죠. 실제로 감독은 '이 작품은 다른 (혹성탈출)영화들의 연장이 아니다 (It's not a continuation of the other films)'라고 말하면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사실상 리부트임을 암시한바 있습니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나 얼마전 개봉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성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영화를 감상하면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감상이 가능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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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를 살펴 봅시다. 관객의 예상대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어떻게 유인원들이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머리좋은' 유인원의 근원에 대해 파고드는 거죠. [혹성탈출 3]에서 보여준 타임리프로 만사오케이하는 황당한 설정보다는 좀 더 설득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보니 영화는 인간 캐릭터 보다는 유인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유인원들의 반란을 이끄는 우두머리 시저의 탄생과 그가 왜 인간에게 저항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지요.
사실 원숭이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는게 쉬운일은 아닌데, 이를 가능케 하는건 웨타 디지털이 만든 CG 캐릭터의 놀라운 표현력 때문입니다. CG 연기의 달인인 앤디 서키트가 연기한 시저는 실제로 생각하고, 말하고, 고뇌하는 유인원을 훌륭하게 그려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무려 CG 캐릭터가 내면연기를 한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유인원인 시저입니다. 여름철 블록버스터 치고 심리 묘사가 이토록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도 흔치 않지만 CG 캐릭터의 진짜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경험도 흔한건 아닙니다.
오락영화이면서 주제의식을 이처럼 명료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주목할만 합니다. 이 작품은 동물학대와 인간의 야만성에 초점을 맞추는데, 인간에 필적하는 지능과 상대적으로 월등한 신체능력을 소유한 시저가 갑의 위치에 서 있을때 인간을 대우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작품 속 주제의식을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오락적 재미와 전통적인 윤리문제를 적절하게 조합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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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올해 블록버스터가 하도 기가 막힐 정도로 맥빠지는 작품들만 있다보니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느낌도 없잖아 있습니다. 내용상 헛점도 종종 보이고, 애당초 유인원 한마리가 샌프란시스코 경찰력에 대항할 만큼의 진용을 단시간에 확보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무리수를 두고 있긴 합니다만 중요한건 이렇게 비현실적인 플롯에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작품 전체의 몰입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혹성탈출]하면 먼저 떠오르는 반전의 묘미를 이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지만 어쩌면 전혀 기대치 않았던 작품이 올 해 가장 주목할만한 블록버스터 중 하나였다는 점이 진정한 반전이 아니었나 싶군요. 영화의 완성도 자체가 반전급입니다.
P.S:
1.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영화는 프리퀄이 아닌 리부트입니다. 하지만 전작에 대한 예우는 잊지 않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68년작에 대한 오마주가 꽤 많습니다.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① '루시우스 말포이' 톰 펠튼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은 Dodge Landon인데, 이 이름은 오리지널 [혹성탈출]에서 테일러(찰턴 해스턴)의 동료들 이름입니다. 또한 이 친구의 대사 중 두 개는 [혹성탈출]에서 찰턴 해스턴이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그 냄새나는 손 치우지 못해, 이 망할 더러운 원숭이 같으니라구!' (이 대사는 [혹성탈출 (2001)]에서 마이클 클락 던컨의 대사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선 원숭이 대신 인간이라고 바꿔썼지만요)
② 수화하는 오랑우탄 '모리스'의 이름은 오리지널 [혹성탈출]에서 자이어스 박사 역을 맡은 배우 모리스 에반스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③ 시저의 어미는 'Bright Eyes'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혹성탈출]에서 자이라 박사가 테일러에게 붙여줬던 이름이죠.
④ 찰턴 해스턴의 모습이 나옵니다. 물론 TV에서의 등장씬을 보여주는 것이지만요.
2.프리다 핀토. 정말 왜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 제로더군요. 아아 어서 그 여신급 포스를 발휘할 영화를 만나야 할텐데..
3.이쯤되면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지요. 게다가 탈출은 무슨... 일본식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 무지의 폐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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